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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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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엄흥도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엄흥도 활동시기 : 조선시대 상세설명 단종사(端宗史)를 읽으면 5백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눈시울이 뜨겁지 않는 사람이 없으며‚ 청령포를 지나노라면 그 구비 구비 흐르는 물이 처량하게 보이지 않는 이가 없을 것이다. 조선조 제 6대 왕인 단종(端宗)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쫓겨나 1457년(세조 3년) 12월 사약을 내려 죽음을 당하니 후환이 두려워 아무도 그 시체를 거두는 이가 없었다. 이 때 영월 호장(戶長) 엄홍도는 가족도 겁내어 만류하였으나 신하된 몸으로 그럴 수 없다며 울면서 명주와 관을 사서 "나는 선(善)한 일을 하고 화(禍)를 당해도 달게 받겠다"며 그날밤 그는 남몰래 홀로 청령포 비탈길을 올라가 단종의 시체를 수습한 뒤 안장할 곳을 찾아 나섰으나 12월이라 산과 들에는 흰눈이 뒤덮혀 어디가 어딘지 분간하기가 어려워 이리 저리 헤메던 중 어느 양지쪽에 다다르니 갑자기 노루 한 마리가 달아나므로 그 곳에 가보니 눈이 녹아 있었으므로 그곳에 시신을 안장하고 이것이 탄로날까 두려워 아들을 데리고 도망하여 숨어 살다가 죽으니 아들 호현(?賢)이 고산에 장사 지냈다. 그 후 세월은 흘러 하늘도 감동하였음인지 단종의 능은 장능이라 일컬어져 지금도 명당이라 불리워지고 있으며‚ 조선조 제18대 현종(顯宗) 때 우의정(右議政) 송시렬(宋時烈)이 왕에게 건의하여 엄홍도의 후손이 등용되고 육신사(六臣祠)에 입향하였다. 1726년(영조 19년)에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증직하였고‚ 1750년(영조 26년)에는 그의 충성심을 기리기 위해 상절사(尙節寺) 및 의산서원(義山書院)을 세웠으며‚ 1758년 (영조 34년)에는 공조참판을 증직하였고‚ 1791년(정조 15년)에 충신단에 배식(配食)하였으며‚ 1833년(순조 33년)에 자헌대부(資憲??) 공조판서를 증직하였다. 또 1877년(고종 14년)에 충의(忠毅)라는 시호를 내려 그의 높은 충성심을 기리고 있다. 그러나 의산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로 없어졌으며 상절사만은 지금도 문경군 상양면 위만리 의산 초등학교 뒤에 남아 있어 봄‚ 가을로 영월 엄(嚴)씨 문중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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