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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수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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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오수눌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오수눌 호 : 사신/국헌 활동시기 : 조선시대 출생시기 : 1565년(명종 을축) 상세설명 장군의 광향은 낙안(樂安)이요‚ 자는 사신(士愼)이며 호는 국헌(菊軒)이다. 오시준(吳 時俊) 칠원 현감의 둘째 아들로서‚ 1565년(明宗 乙丑) 영해부 서면 감천리(琅 英陽 甘川?)에서 태어났다. 성장(成長)함에 따라 체격이 장대(壯?)하고 지혜와 용맹이 비범하였으며 무예를 익혀 통달하였다. 1591년 학봉 김 성일 초유사(招諭使)의 막하(幕下)에 들어갔다. 1592년(宣祖 壬辰) 음력 4월 13일 왜적이 침범하여‚ 정발(鄭撥) 부산 첨사가 전사(戰死)했다는 소식을 듣고 귀성(歸省)하여 아버지께 사뢰니‚ <듣거라 우리 가문(家門)은 원래 대대 무신(武臣)으로서 나라님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나도 무과급제하고 상감으로부터 손오병서(孫吳兵書)를 하사(下賜) 받자왔으나‚ 이미 노쇠(老衰)하여 출전하지 못하지만 너는 바야흐로 연부 역강(年富 力强)한 때이니‚ 아비의 뜻을 받들어 구국 전선에 몸바쳐 공을 세우도록 하여라>하는 말씀을 듣고‚ 다시 거창(居昌)에 가서 김 초유사를 만났다. 그 즈음에 곽 재우(郭 再祐) 의병대장과 김 수 좌감사의 사이가 불화(不和)하여 서로 성토(聲討)하는 격문(檄文)을 발표하므로‚ 김 초유사가 곽 장군에게 서신(書信)을 부쳐 김 감사와 화해하도록 하고 싶었으나‚ 그 조정 역할을 할 인물이 없던 차에 마침 오 수눌(吳 受訥)장군을 보고 매우 반가와 하며 말하기를‚ <그대 아니면 조정 역할을 할 사람이 없으니 수고를 아끼지 말아 달라> 하고 부탁하였다. 1594년(甲午) 정월에 30세로서 호과(虎科 武科)에 급제하였다. 3월 13일 군공(軍功)으로 선무랑 군자감주부(宣武郞軍資監主簿) 벼슬을 제수하고‚ 4월 26일에 창신교위 훈련원판관(彰信校尉 訓練院判官) 또한 현신교위훈련원첨정(顯信交尉訓練院僉正)을 제수하였다. 정해(丁亥) 6월에 왜구(倭寇) 200여 척이 다시 바다를 건너 왔을 때에‚ 이 원익 체찰사와 권 율 도원수와 곽 재우 방어사 등이 성주(星州)에 모여서 전략 회의를 열고‚ 정 기룡 토왜대장(討倭?將)과 오 수눌을 부대장(副?將)으로 삼아‚ 28군(郡)의 관병을 거느리고 고령(高靈) 녹가전에 가서 척후장 이 희춘‚ 황 치원과 함께 왜병의 머리 100여급을 베었다. 그 이튿 날 아침에 용담천(龍?泉) 너머에서 정 기룡 대장의 군대와 합세하여 왜적 수만명(數萬名)을 베어 죽여 시체의 왼편 귀를 끊어 여러 필의 말 등위에 싣고 사로잡은 적병을 몰아서 이 원익 체찰사에게 가니‚ 체찰사가 경탄(驚歎)하면서 <어디서 이런 명장을 얻었으리요>하고 칭송하였다. 그 해 7월 21일 곽 재우 방어사가 의병 수백 명을 거느리고 화왕산성(火旺山城)에 갈 때에 영양군 동향인 조 광의‚ 조 건‚ 조전‚ 조임과 함께 갔었다. 3일만에 영천(永川)에 도착하여 동고록(同苦錄)을 작성하고 서로 맹세하기를 <오늘 이후에 자손 대대로 양성간(再?間)에 정의(?誼)를 두터이 하여 만일 불목(不睦)하는 자가 있으면 불효라고 논단(論斷)하자> 하였다. 8월 6일 화왕성에 들어갈 때에 현풍‚ 영산‚ 창령‚ 밀양 4읍의 군민들이 마치 부모를 만난 듯 반가와 하였다. 얼마 안 있어 적장 가등청정(加藤?正)이 대병을 거느리고 올 때에‚ 장군이 곽 장군과 의논하고 모든 장병에게 훈칙하여 성문을 굳게 지키니 적병이 감히 침범하지 못하고 자퇴(自退)하였다. 이 때에 각 산성이 모두 함락되었으나 화왕산성만이 홀로 보전되었었다. 22일에 정 기룡 장군과 함께 울산을 쳐들어가서 적병 400명의 목을 베이니‚ 나머지 적병은 밤을 틈타서 도산(島山)으로 달아났다. 23일에 양경리(楊經理)가 대군을 거느리고 도산을 칠 때에‚ 장군은 정 장군과 함께 서로 선봉장(先鋒將)으로 유격(遊擊)하여 660여 명의 목을 베었다. 계묘(癸卯)년에 정략장군 훈련원습독관(定略將軍 訓練院習讀官)을 제수하고 을사(乙巳)년에 소위장군(昭威將軍)을 배수(拜受)하였다. 경술(庚戌)년에 어머니의 병환이 위중할 때에‚ 장군의 무명지를 끊어 피를 드리우니 병이 완치되어 8년을 연명(延命)하였으니‚ 장군은 진실로 충효를 몸소 실천한 인물이다. 66세에 감계정사(甘溪精舍)라 이름하는 정자를 지어 해마다 국화주를 빚어 중양가절(重陽佳節 음력 9월 9일)에 빈객과 친구를 맞이하여 즐기며 아호(雅號)를 국헌(菊軒)이라 지었다. 1648년(戊子) 10월 18일에 운명하니 향년 84세이다. 을사(乙巳)년에 공신록(功臣錄)에 올림을 받았으니‚ 오 수눌 장군은 우리 고장 유일한 임란 공신(壬亂 功臣)이며‚ 충효 양전(忠孝 兼全)하여 후세의 향인(鄕人) 뿐 아니라 모든 국민에게 수범(垂範)이 될 인물이다. 참고문헌 : 영양군지‚ 국헌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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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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