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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문

오제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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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오제승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오제승 호 : 경집/미양 활동시기 : 조선시대 출생시기 : 1877년(고종 정축) 상세설명 관향은 함양이며‚ 자는 경집(敬緝)이요 호는 미양(薇陽)이다. 문월당 오 극성 선생의 11세손이요 겸재 오 세윤(謙齋 吳 世潤)선생의 손자(孫子)다. 1877년(高宗 丁丑) 청기면 청기동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성격과 재질이 준수(俊秀)하고 시원스러웠다. 여러 동료 아이들과 무슨 겨룸을 하면 번번(番番)이 이기므로 나중엔 대항하려는 아이가 없었다. 글공부를 함에 쉽게 배워 익혀‚ 스승이 가르치기에 힘들지 않았다. 성장함에 따라 4서 3경과 많은 학문 서적을 정통(精通)하였다. 아버지가 여러 해 동안 병(病)으로 회복할 길이 없어 슬픔과 염려에 잠긴 아들은 제단(祭壇)을 설치하고 밤마다 하늘을 우러러 수없이 큰절을 드리며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하여 달라고 빌었다. 아버지의 대변을 맛보아가며 증세의 경중(輕重)을 가늠하며 위급할 때에 손가락을 짤라 피를 마시어 드렸으나 한명(限命)인지 끝내 별세하니‚ 하늘이 무너진 듯 호천망극(昊?罔極) 수 일간 물 한 모금 안 마시고 통곡하면서도 장례와 제례의 모든 범절을 완전 무결하게 하였다. 묘지(墓地)가 멀었으나 매일 성묘함에 춥거나 덥거나‚ 풍우가 치거나 왕복 30리 길을 3년상을 마치기까지 낮에 바빠 못 갔으면 밤에라도 반드시 다녀왔으니‚ 밤길에 가끔 범이 뒤따랐으며‚ 낮엔 무덤 앞에서 울리는 효자의 통곡소리에 근처의 초군 목동(樵群 牧童)이 함께 눈물지었다. 또한 몽상(蒙喪) 3년 동안은 부부간에 몸을 가까이하지 않았으며‚ 제례주(祭禮酒)외엔 술을 마시지 않았다. 아침마다 사당에 배례(拜禮)하고 나와 책상 앞에 단정히 앉아 마음을 가다듬어 도를 닦았었다. 계묘(癸卯)년 흉년에 친족들이 굶주리니 자가(自家)의 빈곤함에도 불구하고 힘써 구휼(救?)한 자비심에 겨운 분이었다. 또한 고종황제의 국장(國葬)헤도 맏아들 흥원(興元)을 보내어 참예(參禮)시켰었다. 1920년(庚申) 봄‚ 도산원임(陶山院任)하고 그 해 가을엔 호계원임(虎溪院任)한 유림(儒林)이다. 관청에서 효자 포상을 하려하였으나 굳이 거절하니 세칭(世稱) 효우 독행자(孝友篤行者)라 기리었다. 1933년 (癸酉) 별세하니 향년 57세이다. 선생은 문장이 수려하고 글 뜻이 정밀(精密)하며‚ 덕행이 독실하였으므로 별세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원근의 선비들은 서로 탄식하기를 <이제는 우리 유림(儒林)이 텅 비었구나>하였다. 문집 7권이 있다. 미양 오 제승(薇陽 吳 濟承)선생은 천출의 효성뿐 아니라 우리 고장이 낳은 전형적인 유교의 학덕을 갖춘 군자라 하리로다. 선생의 비범(非凡)한 재질과 인품은 10세 어릴 적에 지은 싯귀만으로도 엿볼 수 있으리라. <높으신 옛 어른을 그리워하다 달이 기운 심야(??) 삼경(三更)이요 나의 깊어 가는 생각은 10리나 뻗어 흐르는 강물의 깊이 같아라(懷古三更月 ??十里?)> 참고문헌 : 영영군지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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