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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문

왕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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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왕평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왕평 활동시기 : 근대이후 출생시기 : 1904년 상세설명 왕평의 본명은 이두희(李斗熙)다. 그는1904년 영천시 성내동에서 토호로 이름난 천석군 이권조(李權祚)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불행하게도 태어난지 7년만에 생모를 잃고‚ 연달아 둘째 어머니‚ 셋째 어머니도 사별하였다. 이처럼 불운한 환경 속에서도 어린 왕평은 남달리 천재적인 소질을 보이면서 티없이 자랐다. 영천 보통학교를 다닐 때 그의 예술적 재질에 놀란 어른들은 신동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보통학교의 신학문을 배우면서 부친으로부터 한학까지 배워 졸업한후 곧 서울 배재중학교에 입학했다. 그의 천재적인 재질의 일화로서는 중학교를 졸업한 16살 때 그의 조부 산소 묘비를 자기 손으로 썼다는 것이다. 그가 처음 발을 들여 놓은 곳은 순희악극단 연극사였다. 이러한 그를 집안에서는 완전히 버린 자식으로 취급했다. 1927년의 일이다. 어는 여름날 황해도 백천여인숙에는 연극사 단원들이 장마속에 갇혀 오도가도 못하고 있었다. 평양‚ 신의주‚ 진남포를 거쳐 내려온 이들은 공연을 포기한 상태로써 여관비마저 바닥이 나고 있었다. 당시 일행은 바이올린 연주에 전 수린‚ 작고에 이 교성‚ 가수겸 배우 이애리수‚ 무대 감독겸 각본에 왕 평 등 20명이었다. 이들은 연일 쏟아지는 빗줄기를 보면서 문득 허물어진 옛 궁터 개성 만월대를 생각한 것이다. 아무도 없는 쓸쓸한 빈 터‚ 깨어진 기왓 조각만이 그 옛날 영화를 추억하듯 산만하게 흩어지고 잡초는 무성해 지금도 날을 듯 궁녀들이 오갈 것 같은 전 수린은 바이올린으로 은빛같은 영감을 불러 일으키고 왕평은 신들린 사람처럼 가사를 쓴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 국민을 열광케한 조선의 세레나데로 지칭 받았던 "황성옛터"였다. 이렇게 왕평은 민요적이면서도 흙냄새 풍기는 것‚ 조국애가 넘치는 가사를 썼다. 왕평이 작곡과 작사를 한 "조선행진곡"은 일제의 검열에 걸려 끝내 금지를 당하기도 했다. 레코드 제작이 완료되어도 내용이 불순하다고 판매 금지되면 회사의 손해는 이만저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왕평은 굽히지 않고 많은 민요를 만들었다. 그 중에서도 유명한 레코드 드라마인 "항구의 일야"가 있다. 왕평 자신이 작사 작곡한 것을 눈물의 여왕 전옥과 한께 취입하여 큰 인기를 얻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라디오 드라마의 효시가 된 것이다. 이렇듯 재능과 애국으로 당대를 풍미한 왕평도 죽음은 저버릴 수 없었다. 1943년 북평 강계에서 "돌아온 아버지"란 연극 공연중 무대위에서 40고개를 넘기지 못하고 요절하였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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