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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문

우용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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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우용택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우용택 활동시기 : 근대이후 상세설명 우용택(禹龍澤)은 김천시 개령면 출신으로 한말 때 참봉 벼슬에 있었는데 여중룡 이병구 등 의사와 서울에서 독립운동을 함께 한 사람이다. 1905년 8월 정부가 연해하천 항행 무역권(沿涇河川航行貿易權)을 일본인에게 허용하게 되자 이를 주동으로 처리했던 친일거두 외부대신 이하영을 사제로 찾아가 얼굴에 침을 뱉고 "너의 매국행위는 끝난줄을 모르더니 이제는 하천까지 팔아먹고 장차는 또 무엇을 일본놈에게 팔아먹으려느냐‚ 죽일놈 같은 역적놈아"하고 일갈하고 뺨을 후려 갈겼다. 하영은 공기가 험악해지자 하인들을 불러 선생에게 몰매를 가해 겨우 빠져 나왔다. 이 일에 앞서 선생은 하영의 부하인 이성렬을 온양으로 찾아가 하천건에 관해 혹시 그가 상전인 하영을 설득해서 허가를 막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허가를 저지하는 상소를 같이 올리자고 권유하자 성렬은 이에 응하지 않으므로 선생은 "쥐새끼 같은 놈‚ 죽여도 시원치 않다"고 일갈하고 뺨을 친 일이 있었다. 우용택의사는 최하위 관직인 9품짜리 참봉으로서 친일 거두로 세도가 등등한 장관을 찾아가 호통을 칠 수 있는 위인이었다. 당시 장안에서는 통쾌한 사건으로 화재에 올랐었다. 선생은 여중룡과 더불어 충의사(忠義社)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활약하였고‚ 고종에게 상소하여 매국 5적을 주토(誅討)하고 보호조약의 무효 선언을 주장하기도 하고‚ 일본공사와 일본군 사령관에게는 침략행위를 규탄하는 서한을 보내고 정부에 대해서는 배일 강경책을 건의하는 한편 황성신문에는 여중룡‚ 이병구 등과 공동으로 항일과 항전을 주장하는 시론을 펴기도 했다. 1907년에는 역시 여중룡 이병구 지우석(池瑀錫) 등과 일본공사관을 폭파하려다가 비밀계획서가 가택수색으로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구금되어 8개월의 옥고를 치루었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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