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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문

우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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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우탁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우탁 호 : 천장/역동 활동시기 : 고려시대 본 관 : 단양 출생시기 : 1262년(원종 3년) 상세설명 예로부터 안동은 많은 문인‚ 학자들이 배출되었으며‚ 학문과 예의를 숭상하는 고을로 이름이 높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퇴계 이 황선생을 위시한 수많은 학자들이 태어나 안동이 우리 나라 유학의 중심지로 발전하게 되었으니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 말 예안에 계시던 학자요 교육자이며 문장가인 역동 우탁 선생의 큰 업적을 잊을 수 없다. 선생의 자는 천장이고 호는 역동이며 시호는 문희이다. 본관은 단양으로 1262년 단양에서 진사 천규의 아들로 태어났다. 1278년 진사시에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으로 벼슬길에 나아간 후 1290년 영해 사록으로 있을 때 민심을 현혹하는 요신의 사당을 철폐하여 미신을 타파하였다. 1308년 감찰규정으로 있을 때 충선왕이 선왕(충렬왕)의 비를 희롱하는 인륜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자 흰 옷을 입고 도끼와 돗자리를 들고 궁궐 안에 들어가 이를 극간하고 왕이 잘못을 고치지 아니하자 벼슬을 사퇴하고 안동시 예안면 선양리에 내려와 은거하였다. 벼슬길에 있을 때는 혹세무민하는 미신을 타파하여 민심을 바로 잡고 언제나 옳은 말로 임금을 간하던 선생은 특히 벼슬을 물러난 후 선생의 생애 중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겼으니 그것은 뛰어난 학문 연구와 후진을 양성하는 일이었다. 당시의 대학자 문성공 안 유의 문인인 선생은 원나라를 통하여 들어 온 정자(중국 송나라의 학자 정호‚ 정이를 이름)의 학을 해독하는 이가 없자 한 달 동안 문을 닫고 연구하여 이를 해독하여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이리하여 이학이 우리 나라에도 퍼지게 되고 선생은 동방 이학의 조로서 숭앙받게 되고‚ 세상 사람들은 이로 인하여 '역동선생'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예안에 은거한 선생은 청년 후학들을 모아 놓고‚ 도학‚ 예의‚ 절조를 가르치며‚ 성리학이 우리 나라에 뿌리를 내리는 데에 힘을 다하여 위대한 교육자로서의 업적을 남겼으니 선생이 제자들을 모아 가르친 마을을 위의 세가지를 알게 한 곳이라 하여 지금까지도 지삼리라고 불리어 내려온다. 충선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충숙왕은 선생의 높은 충의와 학문을 사모하여 여러 차례 조정에 나오기를 간곡히 청했으나‚ 늘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만 전념하던 선생은 만년에 성균관 제주직을 맡아 계속 후진을 가르치다가 벼슬을 물러났다. 선생은 이학에만 정통한 것이 아니라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니 고려 말 우리 민족 고유의 시가인 시조가 형성될 때 창의성을 발휘하여 시조를 창작하여 선생의 시조 두 수가 오늘날가지 전해 오니 국문학사상 큰 수확이라 아니 할 수 없다. 1342년 선생께서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니 무덤은 안동시 예안면 정정리에 있다. 그리고 선생의 유품으로는 등과 홍패 유묵 한 장‚ 상현록 한 부가 전하여‚ 역동 유허비가 안동군 와룡면에 세워져 있다. 선생이 돌아가신 후 그 큰 학덕을 기려 후학들이 예안에 역동서원‚ 단양에 단암서원‚ 영해에 단산서원‚ 안동에 구계서원을 세워 선생을 제향하고‚ 그 덕을 사모하고 있다. 끝으로 선생의 시조 작품 중 한 수를 소개하면‚ "춘산에 눈 녹인 바람 건 듯 불고 간 데 없다. 적은덧 빌어다가 머리 위에 불리고저 귀 밑의 해 묵은 서리를 녹여 볼까 하노라."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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