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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문

유숭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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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유숭조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유숭조 호 : 종효/진일재 활동시기 : 조선시대 상세설명 자는 종효‚ 호는 진일재이며 본관은 전주로 조선 제5대 문종 2년에 봉화읍 해저리 송내에서 태어났다. 12살 때에 이미 사서삼경을 통달할 정도로 재주가 뛰어났다고 하며‚ 세조 때에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사유라는 관직에서 시작하여 검열의 직책을 맡게 되었다. 이 때에 이극증이 성종임금에게 선생을 추천하기를 "유숭조는 비록 나이가 어리고 벼슬은 낮으나 가히 다른 사람의 사표가 될 만하니‚ 원하건대 그로 하여금 성균관 학생들을 가르치도록 함이 좋겠습니다."하였더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연산군 9년에 선생은 일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연산군의 방탕한 생활이 날로 심하여 감을 경계하기 위하여 동료들과 함께 10가지의 조목을 들어서 소문(疏文)을 올린 바 있다. 이듬해인 일어난 갑자사화 때에 선생은 사화에 관련되어 모진 매를 얻어맞고 원주로 귀양가게 되었다. 드디어 연산군 12년에 중종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은 왕위에서 쫓겨나고 중종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렇게 되자 아무런 죄가 없는 선생은 풀려나서 판결사에 복직되었다. 그리고 황해도 관찰사를 거쳐 다시 성균관에 들어가 18년 간이나 경사(經史)를 연구함으로써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본격적인 성리학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또 주역‚ 서경‚ 예기‚ 천문‚ 역상에도 많은 연구를 하여 천문을 관측하는 혼천의를 만들어 사용하였다고 한다. 선생은 임금의 명을 받아서 칠서언해(七書諺解)라는 책을 지었는데 당시만 해도 우리의 한글이 널리 통용되지 못하였던 시대였다. 특히 연산군때 갑자사화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글 중 한글로 쓰인 벽보가 나붙게 되자 연산군은 한글을 철저하게 말살하려고 하여 얼마 되지 않는 한글책자도 이 때 대부분 없애고 난 뒤였다. 칠서언해란 중국의 옛 서적인 사서삼경을 우리 한글로 번역한 책인데 이 책은 우리 국문학 발전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였다. 특히 당대의 신진사류로서 성리학의 실천가인 조광조와 김안국‚ 김정국 등 영남학파에 큰 영향을 주었다. 중종 17년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니 나라에서는 이조판서의 벼슬을 추증하였다가 후일 다시 좌찬성과 문목이라는 시호를 제수하였다. 저서로는 진일재문집‚ 대학강목잠‚ 성리연원촬요‚ 칠서언해 등이 있다. *참고문헌:영남인물고‚ 주간조선(82.12.26자.유배지에 심은 뜻)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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