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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문

윤치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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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윤치구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윤치구 활동시기 : 조선시대 출생시기 : 1850년(철종 원년) 상세설명 효자 윤치구(尹致九)는 파평 윤씨이며 문숙공(文肅公) 윤관(尹瓘)의 후손인 윤동범(尹東範)의 둘째 아들로 1850년(철종 원년)에 우보면 두북동에서 태어났다. 자랄수록 성품이 어질고 재주가 있어 아버지의 엄한 교육과 어머니 경주 이씨의 자애로운 교육을 받아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 우애하고 가족간의 화목을 첫째로 삼고 실천하였다. 어머니가 종창으로 고생을 하자 여러 가지 약을 썼으나 낫지 아니하여 입으로 고름을 빨기를 3개월 동안 계속하여 왔다고 한다. 어느 심한 흉년에 화적떼가 닥쳐와서 부모를 결박(結縛)해 놓고 양식을 내라고 협박을 함에 윤치구(尹致九)는 화적떼의 앞을 막고 "나를 잡아 갈 것이지 늙은이를 잡아가서 무엇하오? 무엇이든 줄 테니 우리 부모를 풀어 주시오"하고 눈물로 애걸하였더니 화적떼들도 그 효성에 감동하여 그대로 물러갔다고 한다. 부모 별세 후에는 갖은 예(禮)를 다하여 장사 지내고 3년 동안 여막(廬幕)에서 통곡을 하며 지냈었다. 탈상 후에는 눈비를 가리지 않고 5리나 되는 묘소에 아침저녁으로 성묘를 하였다고 한다. 90노령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성묘를 하다 추운 어느 겨울날 성묘 길에서 돌아오다가 기진맥진하여 길에 쓰러져 그 이튿날 1944년 12월13일에 세상을 떠나니 그때 나이 95세 이었다. 향리의 인사들이 윤치구의 지극한 효행을 기리어 효자비와 비각을 세워 후세 사람들의 본으로 삼고 있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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