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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문

이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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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이견간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이견간 호 : 직향/국헌 활동시기 : 고려시대 상세설명 '객사 깊은 밤 등불만 가물가물 초라한 내 모습 중보다 담박하구나. 두견새 울어대어 밤새도록 울어대어 간밤에 저 산꽃 얼마나 졌을까.' 이 시는 이견간 선생이 1317년(충숙왕 4년)‚ 사신으로 원나라에 갈 때 중국 땅 상주 객관에 머물면서 두견새 소리를 듣고 지은 시로 이 시가 세상에 퍼져 널리 회자됨으로써 세상 사람들이 그 시의 끝귀절에 나오는 말을 따서 '산화 선생'이라 부르게 되었다. 선생은 벽진 이씨로서 자는 직향‚ 호는 국헌이다. 벽진장군 총언의 둘째 아들 영의 9대손으로 고려 24대 원종 때(1259∼12740에 나서 1330년(충숙왕 17년)에 돌아갔다. 선생은 행의가 고결하고 학문이 굉박하여 중국의 주나라 예악에 밝고 당나라 풍조의 문장에 능하여 그 당시 따를 사람이 없었으며 사명(왕의 말과 명령)을 맡아보기 20년에 사대부들이 그의 문장이나 풍채를 모두 우러러보았다.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원나라의 태학사 주방과 같이 춘추대의를 강론할 제‚ 주방이 자리에서 내려가 두 번 절하며 말하기를 "선생은 천하의 큰 선비로 삼한의 문화가 여기에 이르렀습니다."하고‚ 선생을 극구 칭찬하며 선생을 종이 상전을 대하듯 하였다. 고려의 충렬‚ 충선‚ 충숙 3조의 벼슬하여 통헌대부‚ 민부전서‚ 진현관대제학‚ 지밀직사사‚ 홍문관사에 이르렀다. 원나라 황제가 선생의 문장과 풍채에 탄복하여 선생이 살고 있는 곳을 물음에 호음실이라 하며 그 그림을 그려 바치니 이것을 황제가 보고 명자를 새로 만들어 내리니 이로 인하여 호음실이 지금의 성주 초전면 홈실이 되었다. 운곡 원천석(고려말 두문동 의사로 학자)이 "고려 중엽에 많은 선비중 유학자의 도를 실천한 이는 유독 제주 우탁‚ 문안 이견간‚ 문충 이제현 등 몇 사람 뿐이다. 우탁의 주역과 이견간의 춘추는 비록 옛날 중국의 한나라‚ 진나라의 전문가라도 따르지 못할 것이며‚ 이견간‚ 이제현은 그 인품이 매우 고결하고 나라에 대한 충성과‚ 나라를 다스리는 방책이 가히 육선공(8세기 후반 당나라의 한림학사 육지(陸贄))와 짝이 될 것이다"고 하였다. 시호는 문안‚ 성주의 문곡서원과 밀양의 용안서원에 제향되었으며‚ 무덤은 경기도 시흥군 과천면 청계산에 있었으나 임진왜란에 실전되고 후손이 성주 초전 홈실에 단을 모으고 문곡서당을 세워 매년 한식날 제사를 받든다. 또 홈실에는 선생이 살던 옛 집터가 있어 유허비가 있고‚ 신도비도 세워졌다. *참고자료 : 성산지‚ 성주대관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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