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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문

이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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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이광준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이광준 호 : 준수 활동시기 : 조선시대 본 관 : 영천 출생시기 : 1531년(중종 26년) 상세설명 1531년(중종 26년) 7월 8일에 군위읍 내량동서 출생한 이광준은 이 곳 금성면 산운동 금학산 아래 소시랑으로 이거 '학동'이라 자호하였다. 고려 때 영동정 벼슬을 지낸 박 은 그의 14대조다. 자는 준수‚ 관향은 영천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부지런히 글을 읽었고 성동때는 용맹스런 힘이 또한 출중했다. 성균관서 공부하다 32세 때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이래 박사‚ 전적‚ 형조 좌랑‚ 하동 및 창녕현감‚ 형조정랑‚ 임천과 예천군수를 지냈다. 부친상을 당했을 때에는 예에 넘치게 치루었다. 청송 부사‚ 성균관 사성‚ 내자시정을 거쳐 1592년(선조 25년) 봄에 강릉부사로 전임‚ 한달도 못된 4월에 임진왜란을 당하였다. 열읍에 격문을 돌려 모병하여 계락을 세우고 적장 길성이 쳐들어와 그 향도인 왜차가 양양 관노와 짜고 집에 스며 들었을 땐 그 부인이 수하를 시켜 목을 베고 공은 동분서주 적을 막는 등 군공이 인정되어 통정대부에 가자(加資)되었다. 중화군수로 옮겨 흩어진 난민을 구휼‚ 부로 승격케 하고 1594년(동왕 27년) 봄부터는 둔전을 펴 주민들이 즐겨 생업(농사)에 종사‚ 벼 수천석을 거두도록 하여 이재민을 안주 시키니 그들은 비를 세워 송덕했다. 명나라 원병이 간혹 지나친 점 있어도 공은 동요치 않고 바르게 나가 도리어 그내들을 감복시켰다. 형조참의를 거쳐 1603년(동왕 36년) 강원도 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에 이르렀다. 1609년(광해군 원년) 7월 16일에 향년 79세로 별세‚ 봉양면 심평동에 묻혔다. 예조참판으로 증직되고 실기 한권이 전한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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