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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이규인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이규인 활동시기 : 근대이후 상세설명 수봉 이규인…… 그분은 평생에 만석의 큰 재산을 이루고 그것을 국권을 잃고 신음하던 일제치하에서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바쳤으며 특히 교육에 의한 구국의 길을 찾아 경주에 최초의 고등교육기관인 경주중학교를 설립했으며 많은 교훈과 일화를 남기고 떠났다. 위인의 뒤에는 훌륭한 어머님의 교훈이 따르기 마련이다. 수봉도 역시 그랬다. 모부인 무안 박씨(務安朴氏)는 수봉이 7남매 중의 외아들이었지만 나약하고 쓸모 없는 아들로 기르지는 않았다. 일곱 살이 되면서부터 뒷마을에 있는 서당에서 글을 배우게 되었다. 서당의 선생님은 6촌 형 되는 분이었으나 사정을 두지 말고 엄하게 가르쳐 주기를 간곡히 일러둔 까닭에 서당에서의 수학은 일곱 살 소년에게는 여간 고생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머니께서는 항상 배움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눈을 뜨지 못했고 일본을 위시한 여러 나라는 정치적·경제적으로 우리 나라에 침략의 손을 뻗치고 있었다. 그러더니 결국은 우리 나라를 무대로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노일전쟁이 일어났다. 이 두 차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일본은 침략의 야심을 거침없이 드러냈다. 을사년(A.D.1905)의 국치조약이 강제로 맺어 지더니 경술년(A.D.1910)에는 드디어 망국조약이 체결되어 우리는 나라 없는 민족으로 버림받게 되었다. 수봉은 너무나도 엄청난 백성들의 가난 때문에 몸부림쳤다. 나라에서 버림받은 처지에 놓여있는 이 가난한 백성들‚ 주위 사람들의 가난은 젊은 그의 가슴에 응어리를 지우는 고민이었다. 내 나라 일이며 내 이웃의 일인데 모르는 채 눈감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사심이 없는 갸륵한 마음은 하늘도 알았음인지 만사가 순조롭기만 했다. 나라 형편을 바라보고 또 밤낮 없이 찾아드는 과객과 거지떼를 맞으면서 수봉은 궁리했다. 이 궁리의 회답으로 이루어진 것이 「수봉정 보(秀峰亭寶)」의 설립이었다. 「수봉정보」가 목적하는 것은「구휼」이였다.「수봉정보」를 위해 무려 삼천석이라는 큰 재산이 별도로 등기되고 그 수익으로 빈민의 구제‚ 난민의 구료‚ 그리고 장학 등‚ 사업을 하기로 한 것인데‚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일제의 총독정치가 본 괘도에 오르게 되니 정치와 사회면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이 무서운 현실 앞에서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는 뜻 있는 분들이 생각한 것은 「교육」이였다. 피를 흘리면서 독립운동을 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교육을 통해서 젊은 아이들의 가슴에 민족혼을 깨우쳐 주는 일은 더욱 중요한 독립운동의 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한국사람에 의한 한국사람을 위한 교육기관‚ 그것도 고등교육기관의 설립에 대해서는 일본의 통치당국자들이 선뜻 허가해 주지를 않았다. 1930년대의 우리 나라 교육기관은 대학이 단 하나에다‚ 몇 개의 기술계 전문학교가 있었을 뿐이니 5년제의 갑종(甲種) 고등보통학교는 고등교육기관에 해당되었다. 고등보통학교란 한국사람만이 다니는 학교이고 중학교라는 것은 일본 학생만 다니는 학교였다. 경주에 고등보통학교를 설립하겠다는 계획이 발표되자 당시의 민족진영에서는 두 손을 들어 환영했다. 조선일보사와 동아일보에서는 사설에서 그 계획을 찬양하면서 큰 활자로서 전국에 알렸다. 그러나 예상한 바와 같이 총독부에서는 이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민족진영의 여러 지도자가 일어나서 경주고등보통학교를 사립으로 설립 인가해 줄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민족진영의 영도자와 교육계의 인사들이 신문에 담화문을 발표하고 이를 허가하지 않는 일제식민지 정책을 비난했다. 이래서 경주고등보통학교 설립문제는 새로운 민족운동의 한 목표로 등장되었다. 경주고등보통학교를 사립으로 설립하려는 계획은 2년간의 준비기간과 3년간의 투쟁기관을 합해서 만5년이 소요된 1937년에야 결말을 보았다. 그 결말이라는 것은 설립자 측이 주장하던 바와는 거리가 먼「공립」으로 하되 형식적인 경영권은 설립자가 갖는다는 것이다. 이래서 「재단이 있는 공립학교」라는 이상한 형태로 경주고등보통학교는 설립되고 1938년 4월 20일에 개교를 보게된 것이다. 그러나 애통하게도 수봉은 학교설립을 보지 못하고 1936년 5월 3일 세상을 떠났다. 사회장으로 모신 장례식에는 경향 각지에서 온 조문객이 인산 인해를 이루었으니 생전의 공적과 인덕을 짐작할 만하다. 20세기 초두에 우리 민족이 겪었던 처지와 닮은 우여곡절 끝에 경주고등보통학교는 고고의 소리를 올렸다. 그러나 곡절은 다시 계속되어 조선총독부의 학교령 개정으로 「고등보통학교」를「중학교」로 개칭하고 일본인 학생과 공학하는 학교가 되었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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