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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문

이극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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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이극인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이극인 호 : 익양군 활동시기 : 고려시대 본 관 : 영천 상세설명 시호는 익양군(益陽郡)‚ 본관은 영천(永川)이고 영천 이씨의 시조‚ 고려 평장사(高麗 平章事) 고울 군(高鬱郡) 문한(文漢) 의 6대손이다 .또한 상장군 수춘(守椿)의 형이며‚ 신호의대장군(神虎衛?將君) 영양군(永陽君) 대영(?榮)의 직계조가 된다. 고려 중기의 무인으로서 벼슬이 상장군(上將軍)과 평장사(平章事)에서 이르렀고 익양군에 봉해졌다. 1202년(신종 5년)에 동경(東京一慶州)의 별초군(別抄軍)이 운문(雲門)의 적(賊)과 부인사(符仁寺)‚ 동화사(棟華寺)등 두 절의 승려들을 이끌고 영주(永州一永川)를 쳐들어 왔을 때‚ 극인은 스스로 도군사(都軍師)가 되어 아우 수춘과 견수(堅守) 등 날랜 군사를 모병하여 거느리고 갑자기 성 밖으로 뛰어 나가 맹렬히 공격하여 경주의 반적을 모두 소탕하여 평정하였다. 이 전공으로 관군의 장군으로 배명을 받았다. 이 당시 고려는 최씨 무인 정치시대로서 그 전횡에 지쳐있는 때였으므로 간혹은"고려가 황업이 끝나고 신라가 다시 일어난다"는 유언 비어도 떠도는 때였다. 따라서 경주일대를 중심으로 대소간의 반난이 끊이지 않았다. 한편 국내의 정세가 이와 같은 데 밖으로는 또 거란족( 丹族)의 내침이 고려를 괴롭혔다. 1216년 (고종 3년)에는 압록강 건너 쳐들어와 전세는 1승 1패의 위험한 상태였다. 1217년(고종 4년)에는 내륙 깊숙히 쳐내려 와서 원주(原州)를 함락하는 등 전세가 매우 불리하였다. 이내 관군은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 맹공격을 가하니 적은 제천에서 크게 패하고 다시 영남의 박달재까지 쫓겨 갔으나 저항은 여전하여 오히려 거란군은 박달재의 요새지를 빼앗으려 하였다. 이때 고려군의 좌익군사령을 맡은 이극인 장군은 우익군과 중군의 엄호를 받으며 죽기를 무릅쓰고 적을 교란하여 맹렬히 쳐들어가니 마침내 삼군이 합세하여 적을 크게 무찔렀다. 최이가 정권을 계승한 후도 부패는 여전하였으니 마침내 대뇌 국방에 전생을 바쳐왔던 이 극인 장군은 동료 여러 장군과 함께 그 불의를 종식시킬 수단으로서 최이 제거 사건을 모의하다가 발각이 되어 상장군 최 유공(崔愈?)‚ 장군 김 계봉(金季鳳)등 제장수와 함께 비명에 끝을 마치고 말았다. 흔히들 역사는 언제나 강자의 편에 선다고 하지마는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지난 역사를 냉정하게 비판할 때가 오면 역시 역사는 정당한 판단을 내려 주는 것이다. 후일 평장사에 추증되고 익양군으로 봉해졌으며 지금은 후손의 의하여 영천 오미동(五味?) 소재 존덕사(尊德祠)에서 평장사 (文漢)‚ 익양군(克仁)‚ 영양군(?榮) 등 삼위를 함께 배향하면서 그 유덕을 기리고 있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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