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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담명(李聃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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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이담명(李聃命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이담명(李聃命 호 : 이노/정재 활동시기 : 조선시대 상세설명 공은 조선조의 숙종 때 명신으로 자는 이노(耳老)‚ 호는 정재(靜齋)‚ 본관은 광주(廣州)‚ 판서(判書) 이원정(李元禎)의 장자로 1646년 성주구읍(星州舊邑)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민첩(聰明敏捷)하고 효성이 지극하였으니 6세 시에 모친이 병환으로 고생하는 것을 목견하고 공이 의원을 불러 약을 쓰려고 하였으나 나이 어리다고 불허(不許)하매 물러가 종일토록 근심하는 마음을 금치 못하였다고 한다. 10세때 이미 성니과 같이 향교(鄕校) 앞을 지나갈 때는 반드시 말(馬)에서 내려 존숭(尊崇)의 뜻을 표하니 성주목사(星主牧師)가 이 이야기를 듣고 칭찬하여 가로되 " 이 아이가 후일에 반드시 큰 일물이 될 것이라" 하였다. 일찌기 미수(眉수) 허목(許穆)에게 사사(師事)하여 20세시인 1660년(현종 7) 생원시에 일등(一等)의 5위로 입격하고 이어 1670년 문과의 아원(亞元)으로 여러 관직을 거쳐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다. 공의 행적(行蹟)가원데 가장 어려운 일이 있으니 즉 숙종 6년 경신사화(庚申士禍)에 아버지 문익공(文翼公)이 애매하게 옥화(?禍)를 당하게 되니 너무나 억울하고 몹시 원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아버지의 혈의(血衣‚ 피가 묻은 적삼)를 10년 동안이나 입고 복수(復讐)하기를 도모하던 중 마침내 숙종 15년에 이르러 공의 부친이 무함(誣陷)으로 억울하게 죽었음을 왕이 알고 사화(士禍)를 일으킨 주모자 수명을 사사(賜死)케 하고 이미 죽은 자는 그 관직을 삭탈하기에 이르렀다. 그후 정조(正祖)조에 이르러 왕이 이 사실을 아고 공을 칭찬하여 「숙종때의 이모(李某)의 복수(復讐)는 중국 재(齋)나라의 양공(襄公) 후에 처음으로 있는 일이라 하였으니」곧 효성이 지극하면 하늘이 돕는다 하였음으로 이를 두고 한말이다. 1690년(숙종 16) 경상도 지방에 큰 가뭄으로 흉년이 들어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부임한 후 진휼(賑?)하는 방략(方略)을 꾸며서 상부에 품고(稟告)하여 경기‚ 충청‚ 함경 3동의 약곡 수십만석(數十萬石)을 반입하고 군관(軍官) 이원희(李元禧)의 도움과 공의 봉록(俸祿)의 일부를 내어서 구휼하기도 하였다. 공은 학문에도 정통(精通)하여 많은 저서를 남겼으니 전술한 사친곡(?親曲) 12장과 문집(文集) 4권이 있고 그외 이조 때 중국어(中國語)학습서인 박통사언해(朴通事諺解‚6권 3책)의 서문은 공이 지은 글이니 한글에도 조예가 깊었다. 1701년(숙종27)에 향년 5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니 조야(朝野)의 사대부(士??)들이 현신(賢臣)을 잃었다고 슬퍼하였다. 고령군 타산면 지동에 묘비가 소재하니 병조참판(兵曹參判) 유치명(柳致明)이 비문을 지었고‚ 공조판서(工曹判書) 이원조(李源祚)가 글씨를 썼다. 이 사친곡은 1694년(숙종 20) 평안도의 압록강강변인 창성(昌城)에 유배되어 4년 동안 귀양살이하면서 75세 된 고령의 어머니를 한시도 잊지 못하여 지은 시로 한글의 고여(古語)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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