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검색

  • 이미지 유형

라이선스 유형

어문

이세간

추천0 조회수 88 다운로드 수 2 일반문의
  • 해당 공공저작물은 외부사이트에서 보유하고 있는 저작물로써, 원문보기 버튼 클릭 시 외부사이트로 이동됩니다. 외부사이트의 문제로 인하여 공공저작물로 연결이 되지 않는 경우에는 사이트 바로가기 를 클릭하여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저작물명
이세간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이세간 호 : 대임/남강 활동시기 : 조선시대 상세설명 공은 농서인으로 1724(경종 4)년에 태어났고 자는 대임‚ 호를 남강이라 했다. 공은 조마의 신곡리에 살았는데 일찍이 문학으로 이름이 났으며 그 지극한 효심은 하늘도 감동시킬 만했다 한다. 아버지 병환에 겨울에 살구꽃·참꽃이 피어 약을 해 드린 이적이 있는가 하면 꿩이 절로 집안으로 날아들어 부모께 바친 일도 있다. 특히 겨울에 시묘 중 눈에 갇혀 동사할 뻔한 공을 호랑이가 몸으로 감싸 구제한 일은 효심이 미물에까지 미친 결과라고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공의 목숨을 구한 호랑이는 시묘 3년을 공과 함께 지냈으며 그 뒤에도 공의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그 뒤 어느 날 공의 꿈에‚ 호랑이가 함정에 빠져 울며 구해 달라고 애원하는 꿈을 꾸고 깬 공은 등 너머 있는 성주에서 함정에 빠져 동민들에게 포살 직전에 있는 호랑이를 구해낸 일은 전설이 아니다. 효심은 미물도 감동시키고 진심은 사람과 짐승 사이에도 통한다는 말을 공에게서 입증된 것이라 할 만하다. 1795(정조19)년 공이 작고하자 나라에서 남대를 증하고 사림에서는 그 효성을 기리어 시묘 자리에 상친사(처음은 계술사 였음)를 건립‚ 공을 제향하고 사당의 벽에는 당시의 호랑이 상을 그리어 현재도 전해지고 있으며‚ 의호비(義虎碑)까지 세워졌다. 공의 비명은 수봉 여이명이 찬했다. 그리고 부인 장씨 또한 열녀였다. 남편이 죽자 노구에 장례를 극진히 치른 후에 집안 사람들을 보고‚ "남편이 죽고 그 아내가 삶은 삼강대의(三綱?義)에 어긋나지 않겠느냐!" 마치 잠들 듯 죽음을 택해 남편을 따르니 모두가‚ 지아비에 지어미'라 감탄했다 한다. 그 손자 구룡 역시 뛰어난 효자였는데 호를 초사‚ 고종조(高宗朝)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분이다. 천성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두터워 남의 본이 되었는데‚ 네 살 때에 그 어머니를 여의고 동생을 귀여워함이 큰애와 같았다 한다. 하루는 동생이 배가 고파 우는 것을 보자 안타까워 그를 안고 뜰에 나가 종일을 통곡했다. 그러자 지진이 일 듯 땅이 흔들리며 뜰 아래 샘물이 솟아났다. 우는 동생에게 그 물을 손으로 움켜 먹였더니 울지도 않았고 배고파 보채지도 않았다. 그때부터 이 옹달샘을 유천이라 하여 현재도 상친사 아래에 있다. 자라서는 부모를 생각함이 지극하여 죽는 날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성묘를 다녔으며 그래서 현재도 공이 살던 곳(신곡동)을 효자동(孝子?)이라 부르고 있으며 그 후손들 또한 조사의 밝은 덕을 꽃으로 환히 밝히고자 해마다 꽃나무를 심어 온갖 꽃이 피어 이곳을 백화동이라고도 한다. 오늘날도 이 효자동: 백화동(百花?)은 봄‚ 가을이면 상춘객이 몰려 효성에 젖고 열부의 넋에 젖어 효열이 숨쉬는 명소로 알려지고 있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