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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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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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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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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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약정보
- 이세인 호 : 원지/연담 활동시기 : 조선시대 상세설명 1452(문종 2)년에 태어난 선생은 성산(星山)이씨로 자(字)는 원지(元之)‚ 호를 연담(蓮潭)이라 했다. 1486(성종 17)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성종·중종·연산조를 거치는 동안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올랐다. 선생은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었으나 조금도 불운한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원근을 가리지 않고 스승을 찾아다니며 학덕을 쌓고 큰 뜻을 키워 나갔다.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로 특별한 사랑을 받은 선생의 성품은 곧고 사리사욕이 없어 의로운 일에는 일신의 위험을 돌보지 않았다. 1498(연산군 4)년 장령(掌令)으로서 왕에게 상소하여 힘에 부치는 개성부·한산군의 성 쌓는 일을 중지케 함으로써 백성의 부역을 덜게 했다. 또한 간신인 유자광(柳子光)을 탄핵하여‚ 명사(名士)를 마음대로 죽이고 아부하는 자를 자기 패거리로 삼는 무도한 행위를 감히 폭로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많은 뜻 있는 선비들은 통쾌한 일로 여겨 바른 말을 하는 선비로 널리 알려졌다. 1500년에는 다시 유자광을 탄핵했다가 나주로 유배‚ 이듬해 용서되어 대동도찰방(?同道察訪)이 되었으나 1504(연산 10)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는 다시 금산에 유배당하였다. 1506(중종 1)년 중종 반정으로 연산군이 쫓겨나자 죄가 풀려 홍문관 전한(典翰)이 되었고 이듬해는 직제학(直提學)으로서 세 번째의 유자광의 죄상을 탄핵함으로써 드디어 유자광의 세력을 꺾고 귀양가게 하였다. 뒤 1516(중종 11)년에 이조참의로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세 임금을 모시는 20여 년을 대간(臺諫 : 바른 말을 하는 관리)의 직을 거치며 정의를 위해 바른 말을 서슴치 않아 백성의 고통을 덜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는데 온갖 힘을 기울이었다. 선생이 죽자 관직에 있은지 30여 년인데도 집안에는 땟거리가 없었다니 또한 선생의 청렬함을 알만도 하다 하겠다. 묘소는 상주 낙동 동승동(東勝?)에 있으며 신용개(申用漑) 찬의 신도비(神道碑)가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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