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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문

이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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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이약동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이약동 호 : 추노/노촌 활동시기 : 조선시대 상세설명 선생은 벽진 이씨로 자는 추노‚ 호는 노촌이며 1416년(태종 16년)‚ 현령 덕손의 아들로 태어나 향년 78세로 1493년(성종 24년)에 돌아갔다. 1451년(문종 1년)‚ 36세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사섬시직장을 거쳐 1454년(단종 2년)‚ 감찰‚ 황간현감 등을 역임하고 1458년(세조 4년)‚ 지평이 되고 이듬해에 벼슬을 떠나 몇 년간 학문을 연구하다가 1464년(세조 10년)‚ 선전관으로 복직‚ 1466년에 종부시정‚ 구성부사 등을 역임하고 1468년‚ 병으로 사직‚ 1470년(성종 1년)‚ 제주목사가 되어 부하 벼슬아치들의 부정을 단속하고‚ 민폐를 없애며 공물의 수량을 감하여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1474년(성종 5년)‚ 경상좌도수군절도사‚ 1477년에 대사헌이 되어 천추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78년 경주부윤‚ 1480년 전라도관찰사‚ 1482년 호조참판‚ 1487년 한성좌윤‚ 이조참판‚ 1489년 개성유수 등을 역임하고‚ 1491년 지중추부사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제주목사로 있다가 떠날 때에는 가지고 있던 채찍도 그 곳의 물건이라 하여 두고 왔다. 제주도민들은 그 자리에 그 채찍을 걸어놓고 선생의 은덕을 사모하였다. 제주에서 오는 도중‚ 풍파가 일어나 형세가 위태로우매 한 사공이 "섬 사람들이 원님의 청백에 감격하여 보답하고자 갑옷 한 벌을 선사하였습니다." 고‚ 전하자 선생은 곧 갑옷을 찾아내어 바닷물 속에 던졌더니 바람이 잤다 하여 그곳을 투갑연이라 뒷날 사람들이 불렀으며 생사당을 지어 선생을 사모하였다. 선생은 성품이 강직하고 청렴결백한 벼슬살이로 나라에서는 청백리로 뽑혔으며 항상 그 자손들에게는 "금을 보고도 돌같이 생각하라."고 타일렀다. 벼슬에서 물러나와 고향에 돌아와서는 김종직‚ 조위 등과 친하게 사귀었다. 성종 임금이 내린 선생의 제문에도 지성과 순직을 칭송하였으며 평정이라 시호를 내렸다. 참고자료 : 성산지‚ 한국인명대사전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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