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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문

이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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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이억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이억 활동시기 : 고려시대 상세설명 우계인(羽溪人)인데‚ 판중추 사성(判中樞 ?誠)의 아들로서 고려 공민왕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고려말에는 유장(儒將)으로서 많은 활약과 전공을 세웠다. 특히 1388년(우왕14)에는 강계원수(江界元帥)로서‚ 이철성 원수 홍인계(泥鐵城 元帥 ?仁桂)와 함께 선봉장으로 요동(遼東)에 쳐들어가 호군(胡軍)인 명(明)나라 군사를 격파하고 돌아오니 왕이 크게 기뻐하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상을 하사(下賜)하였다. 이해 2월에 명(明)나라 태조는 철성(鐵城)이북은 본래 원(元)나라에 속해 있었으나 그 지방에서 물러 나가라 하기에 철령위(鐵嶺衛)을 두게 되었다. 여기에 불복하는 고려조에서는 요동을 공략하기로 결정하였다. 고려는 적극적으로 요동을 공략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조민수 장군을 좌군 도통사(左軍 都統使)로 삼고 이성계를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 삼아 요동을 공격하였으나 진격하는 이성계는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하여 고려조를 뒤엎은 것이다. 조선조 이태조는 의거를 이르켜 군대를 철수 시켰으며 개국 후에 이억에게 도평의사사겸 의흥친군위 동절제사(都評議事司兼 義興親軍衛 同節制使)를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고 소백산(小白山)아래에 있는 순흥(順興)땅에 은거하였다. 이태조(李?祖)가 여러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아니 하므로 특별히 교지(敎旨)를 내렸는데 교지에 이르기를「내마하에서 어렵고 위태로움을 우릅쓰고 나의 오늘이 있음이 너의 공(功)아님이 없으니 원종공신 일등에 녹(錄)하게하고 전장과 노비를 내림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고려의 신하로서 어찌 이태조가 하사(下賜)한 공물(貢物)을 내가 받겠는가 생전에는 일체 손을 대지 아니 하였다. 이리하여 이 일대에는 각 고을에서 보내온 곡물이 해마다 쌓이고 쌓여 큰 노적가리가 여기 저기 아홉 무더기나 도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아홉 무더기가 쌓인 이 일대를 속칭 구두들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 이때부터 유래된 것이라 한다. 이억공의 묘는 영풍군 단산면 병산리 화석에 위치하고 있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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