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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문

이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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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이운용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이운용 호 : /동계 활동시기 : 조선시대 상세설명 장군은 1562년(명종 17년) 9월16일 매전면 온막동 명대에서 태어나고 자는 경명(景明)이오 호는 동계(東溪)이며 본관은 재령(載령)인데 남해현령 몽상(?祥)선생의 아들이며 신라 좌명공신 알평(謁平)의 후예이다. 장군은 천성이 침착하고 재주 뛰어나 어릴 때 이미 동작이 의젖하기를 어른과 같았으며 어버이 상을 당하여 예절을 지키고 성장하여 한강 정구(寒岡 鄭逑)선생의 문인으로 학문을 닦아 경사(經史)에 능통하였다. 1585년(선조 18년)에 약관 24세로 무과에 급제하여 당시의 병조판서 였던 유성룡(柳成龍)선생의 천거로 1587년(선조 20년)에 선전관(宣傳官)에 오르고 1589년(선조 22년) 정월에 28세로 옥포만호(??萬戶)가 되어 이곳에서 임진왜란을 맞았다. 1593년(선조 26년)에 웅천현감을 제수받고 1595년에는 통정대부에 오르고 1596년(선조 29년)에 이충무공의 천거로 경상좌도 수군절도사(慶尙左道 水軍節度使)가 되었다. 1597년(선조 30년)7월에 정유재란이 일어나 이충무공은 옥중(?中)에 있고 당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원균(元均)이 칠천(漆川). 고성(固城)에서 패사(敗死)하자 우리수군은 전멸되니 장군은 조명을 받드러 바다를 버리고 육지에 올라와서 권응수(權應銖)와 더불어 영천 창암(倉巖)들에서 왜군과 회전하여 창암대첩(倉巖?捷)을 거두었으며 청도 의병과도 연합하여 역전하다. 이충무공이 새로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장군은 경상좌수사에 복직하여 수군 재건에 진력하여 노량해전을 맞이 하게 되었다 장군이 삼도수군 통제사로 부임한 1605년 7월 30일부터 영내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기록한 거영일기(居營日記)는 임진왜란 때 활약한 장군들이 수 없이 등장하여 갖가지 일들이 수록되어 있다. 1607년(선조 40년)에 북쪽 오랑케들이 변방의 침입이 잦아지자 함경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기용되어 민심을 수습하고 별동기병대(別動騎兵隊)를 창설하며 갑산성(甲山城)을 수축하니 변방인심이 크게 안정되었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서 충청도 수군절도사로 부임하였으나 탄핵을 받고 물러나 고향에 돌아와서 1610년(광해군 2년)에 병을 얻어 향년 49로 w조 하였다. 효충장의 선무공신(效忠杖義 宣武功臣). 가선대부(嘉善??). 삼도수군 통제사(三道水軍 統制使).봉식성군(封?城君) 증 자헌대부(資憲??). 병조판서(兵曹判書). 겸 지의금부사( 知義禁府事)를 받고 실기 1권이 있다. 장군은 이서면 금촌동에 있는 금호서원(琴湖書院)에 향사하고 청도읍 원정도에 있는 영정각인 충현사에도 향사한다. (참고문헌: 도주지‚ 국사대사전‚ 식성군실기‚ 인명대사전)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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