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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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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이의조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이의조 호 : 맹종/경호‚명성당 활동시기 : 조선시대 상세설명 주자의 <가례>를 증수 해설하기를 2대나 걸려 이룩한 집안이 있다. 이들은 바로 연안 이씨 윤적과 의조의 부자간이다. 이윤적선생은 1703(숙종 29)년에 구성 상좌원에서 태어났다. 도암 이재 밑에서 수학하고 평생을 예학에 몸바쳐 연구하였다. 선생은 머릿속에 늘 관혼상례로 인한 전국적인 예식의 불통일‚ 나아가 국가적인 의론의 분열을 통감해 왔으며 어떻게 하면 보다 우리 것으로 소화시킬 것인가를 생각해 왔다. 그래서 선생은 주자의 <가례>를 대본으로 하고 고금의 조장을 모아 보다 정교하면서도 편의를 도모하여 우리 실정에 맞게 해설을 겸한 <가례증해(家禮增解)>에 손을 댔던 것이다. 그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는 중립의 입장에 서서 제가의 설을 모으고 거기 해설을 가하고 자신의 의견으로 결론을 내리는 작업은 당시로 봐서는 여간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다. 결국 선생은 이 큰 작업을 유언으로 아들에게 완성시켜 줄 것을 당부하고 작고하니 1756(영조 32)년이었다. 나라에서 선생에게 효행으로 증 동몽교관‚ 다시 그 학문적 업적을 기려 증직으로 집의를 내렸고 겸재 박성원은 그 묘갈에서 숭례처사라 그 덕을 기리었다. 아버지의 명을 받은 의조 선생은 1727(영조 3)년에 태어났다. 자를 맹종‚ 호는 경호·명성당이라 했다. 어려서부터 총명이 뛰어나 남들을 놀라게 했다. 8세에 소학을 마치었고 15세에 성이홍에게 배우고 다시 운평 송능상(송시열의 현손)에 나아가 배웠다. 당시의 학자였던 윤봉구·김희·송환기 등과 강론하여 예학에 크게 앎이 있었다. 선생은 단단한 학문적 기반을 다진 후 설흔 살이 넘어서야 아버지의 유업에 손을 대었다. 그 후 13년이란 시간이 걸려 10권 10책의 방대한 <가례증해>는 완성되었고 1792(정조 16)년 간행되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선생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방초정에서 후진을 양성하는가 하면 한편 저술에 힘을 기울여 <의요보유(義要補遺)> 2책‚ 경의수차(經義隨箚) 4책을 내는 동안 나라에 그 학문적 공적이 들리어 1799(정조 23)년 공능참봉이 제수되었으나 사양해 나아가지 않자 다시 첨중추오위장(僉中樞五衛將)을 제수받았다. 1805(순조 5)년 돌아가시니 나라에서 이조참의(吏曹參議) 성균관 제주(成均館 祭酒)를 증직하였으며 묘소는 구성면 상원리에 있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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