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검색

  • 이미지 유형

라이선스 유형

어문

이자성

추천0 조회수 208 다운로드 수 1 일반문의
  • 해당 공공저작물은 외부사이트에서 보유하고 있는 저작물로써, 원문보기 버튼 클릭 시 외부사이트로 이동됩니다. 외부사이트의 문제로 인하여 공공저작물로 연결이 되지 않는 경우에는 사이트 바로가기 를 클릭하여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저작물명
이자성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이자성 활동시기 : 조선시대 상세설명 석주 이상룡선생의 항일 민족 운동은 대체적으로 국내 활동과 1910년 국치 이후의 서간도에서의 국외활동으로 나눌수 있다. 국내에서는 1895년의 을미사변 이후 안동에서 일어난 권 세연의 의병진을 돕기도 하고‚ 또한 동지 박 경종과 함께 거금을 투자하여 경남 합천의 가야산 험지에 군사기지를 축조할 계획까지도 세웠으나‚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막는데는 무력함을 깨닫고 그는 새로운 진보를 찾게 되었다. 그 결과 새로운 시대의 사조와 동서의 신간 서적을 구하여 읽고 동아에 밀어 닥친 제국주의 열강의 국제 정치와 일제의 근대적 군사력까지도 새로 인식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유교적 전통 사상에서 빨리 깨어나 근대적 민중계몽과 교육을 통한 민족 구국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그 예로서 보수를 고집하는 안동 유림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인식‚ 김동삼‚ 김형식 등과 2천여명의 애국회원을 규합하여 대한 협회 안동지회를 조직하여 회장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시국 강연회를 열어서 민중의 각성과 단결을 촉구하고 청년들의 신교육을 주장하여 안동 지방 처음의 현대식 교육기관인 협동학교 등 초중등 학교를 군내 각처 설립하고‚ 1910년 국치까지 그가 정성을 다하여 추진한 이 운동은 적지 않는 성과를 올렸었다. 그러나 1907년 정미 조약과 이어서 1910년 한일합병 조약의 체결로 마침내 일제에 국권을 침탈당하자 홀연히 만주로 망명하여 고대 한 민족의 활동 고지인 가도 지방을 항일 독립 운동의 거점으로 삼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30만 유랑 한교를 경착시킴으로서 간도 개척의 선구를 담당하였고‚ 빼앗긴 국토를 되찾기 위하여서는 스스로의 힘을 길러야 한다는 판단 아래 유능한 인재 양성에 심형을 기울였다. 구체적으로 국외 활동의 내용을 든다면 첫째 광복 대업의 성취를 위하여 인재를 양성하는 신흥학교를 건립하여 국내와 그곳의 유능한 청년을 모아 문무 겸전의 신교육을 실시한 것이다. 이것은 오직 일제와 독립 전쟁을 수행활 무관 교육과 민족 운동의 전위가 될 인재의 양성인 것이었다. 그 결과 3.1운동 직후까지 이곳에서 배출된 인재는 장차 남북만주와 중국 대륙에서의 항일운동의 전위대가 되었다. 둘째는 광복운동의 터전을 닦고 한족의 생활 안정을 위하여 서간도 계척을 추진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중국인에게는 쓸모없는 황량한 저습지를 빌려서 이주 한족들로 하여금 수전을 만들어 이를 성공시킴으로써 수전 농업이 만주땅에 정착토록 하였으며‚ 나아가 교민들의 경제적 안정의 기반을 확고히 함은 물론‚ 광복 운동의 원동력이 되게 하였다. 선생은 1919년 4월 유하현 고산자에서 한족회를 바탕으로 서간도 한족 대표를 모아 일제에 항거하는 독립 전쟁을 기약하고‚ 그를 주도할 군정부를 건립하였다. 그는 총재에 추대되어 독립 전쟁을 수행할 군정부를 영도하고 한편 한족회로 하여금 한족의 지방 자치를 수행케 하였다. 이 군정부는 그 해 5월 신흥학교를 신흥무관학교로 발전시켜 3.1운동 이후 줄지어 넘어오는 열혈 애국 청년들을 모아 독립군 간부로 양성하였다. 그리하여 이곳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독립군 수가 2천여명을 헤아렸다. 이같이 추진한 군정부를 그 해 11월에 서로 군정서로 개편하고 한 민족에 두 정부가 있을 수 없으며‚ 광복운동 중에는 권위보다 단합이라는 대의명분을 세워 상해임시정부를 지지하고 그 산하에 들어가면서 선생은 군정부 내의 일부 반대 여론을 설득하고 대의를 관철시켰던 것이다. 1925년을 전후하여서는 상해 임시 정부의 내흥으로 대통령 이승만의 탄핵 면직안이 통과됨에 따라 박은식이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되고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 중심 체제를 국무령 체제로 고쳐 신망 있는 선생을 국무령으로 선임하였다. 선생은 1925년 9월 24일 드디어 새로운 국무령으로 취임하고 새로 조각을 하여 임정 내부의 고질화된 파쟁을 조정하는데 전심갈력하였으나 결국 성공치 못하고 사임을 선언한 후 호란자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동안 일제의 만주대륙 침략은 가열화되어 만주를 석권하고 1932년 3월에는 일제에 의하여 만주국이 성림되어 만주에서도 민족 운동의 길이 막혀 어려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런 중에 선생은 신병을 얻어 서란 소성자에서 정양중 그 해 5월 12일 독자 준형에게 <국토를 다시 찾기 전에는 내 유골을 고국에 싣고 가지 말라> 유언하고‚ 다시 "그대들은 나아서 옛동산을 지키고 슬픔일랑 거두어라‚ 나라를 찾으면 돌아와 다시 여기 머물 것이다"라고 하며‚ 거국망명의 길에 오르신 선생은 끝내 고토를 밟지 못한 채 이역땅 멀리서 묻히시고 말았다. 교육기관인 협동학교등 초중등 학교를 군내 각처 설립하고‚ 1910년 국치까지 그가 정성을 다하여 추진한 이 운동은 적지 않는 성과를 올렸었다. 그러나 1907년 정미 조약과 이어서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