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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문

이충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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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이충노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이충노 호 : 직여/해재 활동시기 : 조선시대 상세설명 대를 이어가며 주자학을 연구하고 실천하여 <사세 학행‚ 사세 유일>러 명성을 얻은 집안이 주서가 성산인 이충노 선생의 집안이다. 주자학이 우리 나라에 소개된 것은 고려말 안향 이후지만 조선시데에 들어와서 이 사상을 국시로 삼자 크게 발전하였다. 주자학이 본격적으로 연구되고 대성한 것은 퇴계·율곡 등에 와서라 할 수 있다. 선생 집안의 주자학 학통의 참봉이 된 흔의 아우로 고향에 은거하며 성리학에 잠심‚ 연구하여 학행으로 중종조에 안음현 훈도를 제수받고 사후에 이조참의가 증직되었다. 선생의 아들로 충노에 태어났는데 자는 직여‚ 호를 해재라 했다. 선생의 성품은 순숙하고 재예가 뛰어났다. 우리 나라에는 대개 중종 38년(1543)경에 주자서 간행본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선생은 이 때에 문학에의 뜻을 전향하여 주자학 연구에 마음을 쏟기 시작하였다. 퇴계 이선생의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가 1553년에 나왔고 선생이 학행으로 제능 참봉을 제수받은 해가 1556(명종 11)년이니 거의 동시에 주자학 연구에 발을 들여놓았다고 할 수 있겠다. 일찍이 선생은 선산 해평에서 조선 명종 때의 대학자였던 후계 김범의 제자인 고응척(중종 때의 학자·시임)과 강론하여 더욱 학문의 깊이를 더해 갔다. 선생이 저술한<주자절요(朱子節要)>는 여러 권질이 되었는데 김범선생이 보고 극찬하여‚ "주자학을 개척함에 반드시 이선생(이황)보다 먼저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비록 그 깊이에서 이 선생보다 못한 점이 있더라도 독창적인 관점에서 주자학을 계발한 창의력은 가히 호걸지사라 할 만하다." 고‚ 학문의 벗이 되길 원했다 할 정도로 선생은 주자학의 일면을 개척한 분이다. 돌아가시자 나라에서 증직으로 이조참판을 제수하였다. 묘소는 감문면 태촌 완동에 있으며 송준필 찰 묘비갈이 있다. 이 뒤를 이어 나온 분이 아들 지남인데‚ 자는 성지‚ 호를 후암이라 했다. 20세에 이미 선생은 사자오경에 통했으며 아버지가 <주자절요>를 저술할 때부터 절로 감화 받은 바다 많아서 과거로써 부귀공명을 외면한 채 주자학연구에만 전심하였다. 선생은 명유들과 교류하였으며 감호(鑑湖) 여대로 와는 절친한 사이였고 모든 일을 처리함에 주서를 규범으로 하였기에 세상에서 '주서가'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1662(선조 35)년 학행으로 사재감 참봉(司宰監 參?)을 제수받았고 돌아가신 후 증직으로 이조판서를 제수하였다. 선생의 손자로 동준이 났는데 자는 사걸‚ 호를 송재라 했다. 대로 전해지는 주자학 연구에 전임하였으며 임진란 후에는 현감 기대익‚ 감역 성윤덕과 향안을 마련‚ 제자를 가르치며 특히 임란후에 퇴락한 개령 지방의 향풍을 바로 잡는데 힘을 쏟아 군민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인조 때에 학행으로 정능 참봉(靖陵 參?)에 나아갔다가 다사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승진되니 세상에서 이르기를‚ "4세 학행‚ 4세 유일은 성산씨 뿐이로다"고 일컬었다. 묘소는 선영하에 있으며 청산 권상익 찬의 묘비갈이 있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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