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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문

이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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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이현규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이현규 호 : 포겸/혜인 활동시기 : 조선시대 상세설명 1862년(철종13) 안동군 예안면 교동에서 출생하였는데‚ 어려서부터 효성과 우애가 남다르며 학문을 좋아하고 성품이 강직하여‚ 일찍부터 이웃에 촉망을 받았다. 그러나 때는 국운이 이미 기울어져 일본의 통치를 받게되자 의분을 참지 못해 의병에 투신하고 항전의 선봉에서 의병상장 이중린(李中麟) 산하 진무장(鎭撫將)으로 활동하였으나 보람도 없이 1910년 경술년 국치(庚戌國?)를 당하자 그는 땅을 치고 통곡하였으며 이를 비분강개(?憤慷慨)하여 그날부터 포의(布衣)를 입고 패랭이를 쓰고 나라를 잃은 한 죄인이라고 상심하면서 수십년간 산촌으로 방랑생활을 하다가 1934년 겨울‚ 이 고장 안정면 생현동(속칭‚ 생고개)에 정주한 후 고사리를 씹으면서 괴로운 만년을 살았다. 그리하여 '패랭이 노인'으로 통하기도 했다. 1940년대에 일본은 태평양전쟁의 최후 발악과 함께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애국심과 의분에 넘치는 그는 마지막으로 남은 우리 민족의 '얼'이 담긴 성명 3자까지 빼앗아 가려고 하니 차마 두 눈으로 이 꼴을 볼 수 있겠는가‚ 하고 자결할 것을 결심하고 「남들은 말하되 삶이 가장 즐겁다는데 내 굳이 죽으려 함은 까닭이 어이없겠는가. 아나의 성명이나마 그대로 간직하여 죽은 뒤 조상께 가 뵙고자…… 」하고는 식음을 끊은 지 36일만에 자질에게 명하여 「혜인 진성 이현구 지 구(兮人 眞城 李賢求 之 柩)」라고 쓰게 한 판자 위에서 1940년 8월 79세로 드디어 운명하였다. 그는 이렇게 나라를 위한 우국충정으로 세상을 떴으니 3천만 겨레를 향한 처절한 경고가 되지 않을 수 없다. 1945년 8월 해방으로 나라와 이름을 되찾은 후 그를 추모하는 마음 금할 길 없어 지역 주민들이 생현계(生峴?)를 모아 이곳에 순절비(殉節碑)를 마을 어귀에 세워 그를 추모하고 있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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