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검색

  • 이미지 유형

라이선스 유형

어문

이현일

추천0 조회수 86 다운로드 수 1 일반문의
  • 해당 공공저작물은 외부사이트에서 보유하고 있는 저작물로써, 원문보기 버튼 클릭 시 외부사이트로 이동됩니다. 외부사이트의 문제로 인하여 공공저작물로 연결이 되지 않는 경우에는 사이트 바로가기 를 클릭하여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저작물명
이현일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이현일 호 : 익승/갈암 활동시기 : 조선시대 출생시기 : 1627년(인조 5년) 상세설명 관향은 재령(載寧)이요 자는 익승(翼昇)이며 호는 갈암(葛庵)이다. 석계 이시명(石溪 李時明)선생의 셋째 아들로서 1627년(仁祖 5年 丁卯) 영해부 인양리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영특한 태몽으로 태생하니 용모가 수려하고 재질이 비범하였다. 14세에 석보(石保)로 이사올 때‚ 장래에 나라를 다스리려는 큰 뜻을 품고 4서 3경과 역사책들을 읽었으며‚ 손오병서(孫吳兵書)와 무장장감(武將將鑑)을 즐겨 읽었다. 15세에 여러 벗들과 더불어 단풍을 군기(軍旗)로 하여 팔진도(八陳圖)의 병법을 훈련할 제 대장이 되어 지휘하기를 신통하게 했으며 신편 팔진도설(新編 八陳圖設)을 창작하기도 했었다. 22세에 향시(鄕試)에 합격하고 과거(科擧)에 급제했으나 벼슬하려 아니하고 독서와 수련에 힘썼다. 이에 갈암 선생의 학문과 정치경륜은 무엇인지 간략히 고찰(考察)하기로 한다. 선생은 주자학(朱子學)을 집대성(集?成)한 대유학자인 퇴계 이 황(退溪 李 滉)선생의 직계인 성리학자로서‚ 퇴계의 사상과 학문의 정수(精粹)를 정확하게 이해 천명(理解 闡明)하여 퇴계학을 중흥 발전시키고‚ 이로써 주리론적(主理論的)인 성리학의 이론적 기반을 확고하게 하였다. 그 성리학의 뿌리는 주자(朱子)의 이기 이원론(理氣 二元論)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긍정(肯定)하고 이에 주리론(主理論)을 주장하는 것이다. 곧 4단(四端 仁義禮智)은 이(理)요 7정(七? 喜?哀樂?嫌?)은 기(氣)인데 이가 기의 위에 군림(君臨)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리론(主理論)으로서 율곡 이 이(栗谷 李 ?)선생의 주기론(主氣論 곧 四端은 七?中의 善一便만을 가르킨 것이라는 설)을 반박하고 4단은 이발(理發) 7정은 기발(氣發)로 봄으로써 4단과 7정을 대립(對立)이라고 판단(判斷)한 것이다. 선생은 우국충정(憂國衷?)과 의리정신(義理精神)에 투철한 도학자로서 실질적인 위민 정치와 국가 보위와 융통성 있고 합리적인 정책 실현을 중요시한 경륜 있는 정치가였다. 진삼사(陳三事)에서 「나라가 평안할 때일수록 전쟁에 대하여 잊어버리면 반드시 위태로울 것이다」하였으며‚ 64세 때에는 임금을 알현(謁見)하고 「지금처럼 흔적이 드러나지 아니한 때에 감사(監司)와 병사(兵使)에게 당부하시어 비밀리에 방비(防備)하게 하시고 북지요해처(北地要害處)는 마땅히 막아 지키게 하여 비상시에 대비(對備)하도록 하소서」하고 건의(建議)하기도 했었다. 또한 군인이 권세와 결탁하여 영리(營利)할 계책과 승진만을 꾀하는 무리가 있음을 통렬히 비난하고 장수를 잘 선택해서 군정(軍政)을 밝게 할 것을 64세 때에 올렸으니‚ 진 6급무소(陳六?務疏)에 진술되어 있다. 정치의 요체(要諦)는 민정(民?)을 살펴서 만백성과 호오(?惡)를 같이할 것을 강조하고 당시에 흔한 폭정(暴政)과 무거운 부세(賦稅)와 굶주림에서 해방시킬 것을 강조하였으니‚ 이것은 51세 때 지평이 되어 올린 진오조소(陳五條疏)에 잘 나타나있다. 선생은 의리의 선양(宣揚)을 정치적으로 중요시하였다. 65세 때에 사육신(死六臣)의 복관치제사액의(復官 致祭賜額議)를 올린 일이나 임란(壬亂)과 병란(丙亂)때에 수의순절(守義殉節)한 장병들을 정려표창(旌閭表彰)케 한 일들이 그것이다. 선생은 개혁정책도 주장했으니 불합리한 제도와 폐법(弊法) 비정(秕政)의 개혁을 주장한 소(疏)와 계(啓)에는 언제나 강경한 개혁론을 주장했으므로‚ 반대당 출신의 권력 정객으로부터 배척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선생은 무엇보다도 도덕정치의 주창자(主唱者)였다. 많은 저술과 진강(進講)에서 정치를 덕으로써 하기 위해서는 이기(利己)를 버리고 천리(?理)를 회복하여야 하는바 그러기 위해서는 궁리(窮理)가 순수(純粹)하고 생활이 경건(敬虔)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처럼 선생은 도덕군자요 경륜(經綸)있는 정치가였다. 정치적인 포부를 실현하지 못하였으나 그 정치적 이상(理?)은 올바르게 인식(認識)되어야 할 것이다. 1704년(肅宗 30年 甲申)에 별세하니 향년 78세이다. 1718년(肅宗 44年 戊戌) 영해의 인산서원(仁山書院)에 배향하고 1871년(高宗 8年 辛未)에 복관(復官)하여 문경공(文敬公)이라 시호(諡號)하였다. 갈암 문집 23권이 있으며‚ 숙종대왕이 선생에게 내린 성유록(聖諭錄)이 있다. 참고문헌 : 영양군지 및 "李 葛庵의 韓國儒敎學史上의 位置"에서...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