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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문

장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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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장재성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장재성 활동시기 : 근대이후 상세설명 나라 없는 겨레가 자유로울 수 없다고 하시며 붓 한자루로 민족의 설움을 외쳤고 붓 한자루로 겨레를 깨우친 장재성 선생은 1914년 선산군 선산읍 교동에서 인동장씨인 병희(炳熙)씨의 셋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일찍이 배재중학교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대학에 입학하여 의열 단원 최원형(崔垣亨)동지와 함께 상하이 임시정부의 비밀지령으로 조국의 자유와 해방을 위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여 재일동포 및 유학생과 조국내의 애국동지들에게 항일 사상을 고취하고 애국을 부르짖는 시집(詩集)을 배부하였으니 "말 하는 침묵"이 그것이다. 또 다시‚ 애국가요 "명사십리"(明沙十里)를 작사하여 널리 홍보하여 애국사상을 고취하였으며「민족이여 일어나라」는 잡지를 발간하여 애국하는 날카로운 필봉을 휘둘러 정의와 조국독립에 앞장섰다. 또한 민족정신을 국내외에 선양할 목적으로 항일 영화"홀주머니"의 시나리오를 창작하여 영화감독 신경균(申敬均)동지와 합심하여 선전 영화를 제작하려고 하다가 모든 음모가 누설되어 1939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경찰의 가혹한 고문에 추호도 굴복하지 않고 결사 항거하며 동지들의 이름과 계책을 하나도 실토하지 않았다. 대구 감옥에 복역중 악형의 여독으로 병을 얻어 보석중 1939년 6월 25일 25세로 일생을 마쳤다. 목메이게 그리던 조국광복과 함께 선생의 탁월한 애국정신을 높이 기리고자 국가에서는 1968년 3월 1일 독립 유공 대통령 표창(제35035)이 추서되였으며‚ 1980년 11월 12일 온 군민이 뜻을 모아 선산군 문화원 주최로 선산읍 동부동 로타리에 기념비를 제막하였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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