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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문

전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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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전삼성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전삼성 호 : 서강 활동시기 : 조선시대 출생시기 : 1571년 7월 19일 상세설명 선생은 문정공용성부원군 방숙(邦淡)을 조상으로 하는 용궁 전(全)l로 서기 1571년 7월 19일 지금의 영천 명산동에서 성균생원 증 형조참의 희상(希祥)의 손자이며 첨지중추부사 증 호조중추부사 증 호조참판 몽용(?龍)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품성이 자애로우면서도 과감하고 의협심이 강한 선생은 또‚ 지혜와 총명이 탁월하여 학문이 일찍 숙달되자 '지산 조호익'선생의 문인이 되어 학문을 탐구하는데 전심전력하며 세상을 공명과 영달은 허공에 뜬 구름처럼 생각하며 한가한 마음으로 일생을 보낸 우아한 학자이시다. 선생은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가 살아 계실때에는 의복‚ 음식과 거처등절에 지성으로 봉양하였을 뿐만 아니라‚ 어떤 일에도 부모님의 의사에 절대 순종하며‚ 항상 화열한 얼굴과 부드러움 음성으로 부모님의 마을을 즐겁게 하였으며‚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도 슬퍼함이 지극하고 봉제사에 정성을 다할뿐만 아니랄 산소에서 시묘살이로 삼년상을 끝내었으므로 그 효성에 대한 칭찬이 온 고을에 자자하였다. 삼성은 자원하는 노복(?僕) 수십 명을 데리고 불타는 적개심에 비약적으로 의진을 찾아 갔다. 나이 젊은 삼성은 최전선(前선線)에서 상사(上司)의 지휘대로 움직이는 한 졸병이었다. 체격이 굉걸(宏傑)한 삼성은 타고난 용감성에 학문으로 수련된 대의충절이 결국 자신을 버리고 적군속에 돌격하는 장렬한 장면이 나타나고 말았다. 전투가 끝난 후 선생이 인솔했던 노북들 중에는 살아오지 못한 사람의 수가 태반이 넘었다. 그 처자들을 어루만지며 위로하며 전담을 나누어 주고 거느리고 있던 모든 종들을 한데 모아놓고 "나와 너희들은 우리 나라의 제도상 비록 신분이 달라서 상전과 노복이었으나 국가를 위해 목숨을 같이했는데 어찌 그 마음이 계급에 관계되리. 내 오늘 너희들 앞에 종 문서를 불사르고 자유의 몸으로 해방시키니 각자 갈곳을 찾아 생업을 종사하라." 하니 여러 종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그럴 수 없습니다. 어찌 저희들이 상전을 두고 어디로 가라십니까? 하고 울부짖으느니 보내는 상전도 떠나는 종들도 헤어지는 아쉬움의 인정을 애닯기만 했다. 충무공의 '한산대첩'과 각도 의병들 승리로 8년 풍진이 겨우 진압된 1600년 6월 20일에 대부인 박씨가 돌아가고 겹쳐 1602년 12월 9일에 선대부참판공이 돌아갔다. 전투와 묘막 살이에 심히 쇠약한 선생은 1606년 다시 대봉정사에 들어사 심신을 휴양하고 학문 연구를 시작하였다. 차차로 모여드는 문인들이 많이 늘어서 별도로 학사(學舍)를 건축한 것이 곧 지금의 '대곡서당'이다. 제자들은 서당 뒷 산마루 위에 넓은 광장을 닦아 두고 읍양 진퇴의 예도를 배웠다. 이곳을 '예정'또는 '예단'이라고 했는데 오늘날 그 산 동쪽 계곡을 예정곡이라 부르고 있으니 400년 오랜 유서가 전해지고 있다. 선생은 학문에 열중하면서 농사에도 힘써 참여하였다. 400년 전인 당시에도 선생은 약초 화초 재배에 능숙하였다. 선생은 항상 허영심을 경계하며 실질적이요‚ 또 실천적인 교육에 힘쓰되 시낮은곳을 지나야 높은 곳에 갈 수 있는 쉬운 원리를 잊지말며 자신의 위치에 적당한 일에만 힘을 쓰라 하였다. 선생의 깊은 학문은 당시 명사들의 추앙한 바 이거니와 선생은 쉬운 말과 쉬운 일을 하였다. 언제나 평범한 사람으로서 평범한 생활을 하였다. 선생은 술을 좋아했고 또 시를 좋아하였다. 선생에게 사람이 따르기 어려운 특행이 있다고 하면 평상시 평범한 생활 가운데 크고 작은 모든 자세가 합리적이요‚ 또 합예(合禮)적이었다는 점일 것이다. 특히 효재 충신이 부족하고는 세상에 설수 없다 한 경고와 훈계속에는 끝없는 독행(篤行)의 정신이 살아있다. 당시 선생의 훌륭한 인도력에 유염(濡染)된 제자들은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능히 대곡서당 선비임을 알 수 있었다. 선생의 높은 문인중에는 정명계‚ 정삼휴 두 명유와 수군 절도사 전존성 그리고 명와전지성을 들 수 있다 .한번 선생의 문정에 들려본 사람들은 모두 향초밭에 들어간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순순하고 고결한 선생은 1641년 9월 2일 70세를 일기로 대봉정사에서 고히 잠드니 동년 11월 유림장을 거행할 대 조객이 100여명에 이르렀다. 선생의 출생지 명산 대추골에는 선생의 석채례를 지내는 대곡서당이 보존되어 있다. 선생의 충의와 효행 그리고 노예를 해방하신 인애(仁愛)의 정신은 길이 민족대대의 본보기로 존경되어야 하겠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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