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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문

정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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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정곤수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정곤수 호 : 여인/백고 활동시기 : 조선시대 상세설명 선생은 청주 정씨로 자는 여인‚ 호는 백곡‚ 1538년(중종 38년)‚ 남산리 유촌(지금의 대가면 칠봉동)에서 사중의 아들로 태어나 6세에 종숙 승문의 양자가 되었으며 처음 이름은 규라 하였는데 나라에 세운 공으로 선조가 곤수란 이름을 내렸으며 향년 65세로 1602년(선조 35년)에 돌아갔다. 장성하여 퇴계 이황에게 심경을 배웠으며 1567년(명종 22년)진사가 되고‚ 1572년(선조 5년) 의금부도사‚ 경력을 거쳐 1576년‚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뽑혀 부사과가 되고‚ 이어 통정대부‚ 상주목사 파주목사를 거쳐 1583년(선조 16년)에 강원도관찰사가 되어 1586년 영월 노능(단종의 능)에다 사묘를 세워 단종의 위판을 봉안하고‚ 1587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어 큰 기근을 구제하고 돌아와 가선대부‚ 서천군에 봉해지고‚ 대사성 동지돈령부사로 강의대부에 오르고‚ 이어 병조와 이조의 참판‚ 대사간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우승지로 선조를 의주로 호종하고 자헌대부에 올랐다. 지돈령부사로서 청병진주사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원병을 청했더니 명나라 조정이 거절하므로 황제가 있는 황극전 뜰에서 밤낮 3일간 피눈물로 호소하여 그들을 감동시켜 병부상서 석성으로 하여금 황제의 승락을 얻어 원병을 보내도록 하였다. 1592년‚ 명나라의 원병 선발대로 요동 부총명 조승훈이 16‚700명을 이끌고 왔으며‚ 이듬해 정월‚ 이여송제독이 40‚000병을 이끌고 와서 평양을 수복하고 계속 남쪽으로 왜군을 쫓아 내려오니‚ 1595년에 예조판서‚ 1596년‚ 의정부좌찬성으로 벼슬이 올랐으며‚ 선생이 돌아간 후 1604년(선조 37년)충근정량갈성효절협책호성공신 1등으로 영의정을 증직하고 서천부원군에 봉해지고 충익이라 시호하였다. 선생은 글씨에도 능했고 전고(왕실 또는 나라의 길흉에 관한 의식이나 옛날부터 내려 오는 규칙)에 밝았다. 참고자료 : 한국인명대사전‚ 성산지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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