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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구(鄭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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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정구(鄭逑)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정구(鄭逑) 호 : 한강(寒岡) 활동시기 : 조선시대 본 관 : 청주 출생시기 : 1543년 출 생 지 : 1543년 시대 : 조선시대 상세설명 선생은 1543년(중종 38년)‚ 대가면 칠봉동 유촌에서 태어나 78세로 1620년(광해군 12년) 팔거현 사양정사(지금의 대구시 칠곡 사수동)에서 세상을 떠났다. 자는 도가‚ 호는 한강‚ 본관은 청주로 대장군 의의 후손이며 복재 총의 6대손이요‚ 사중의 세째 아들이다. 22세에 과거보러 상경한 적이 있었으나 느낀 바 있어 과장에 들지 않고 귀향하여 그 길로 과거를 포기하고 오직 학문에만 정진하였다.1573년(선조 6년)‚ 31세 때에 조정에서 예빈시참봉으로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고 이로부터 7년 동안 건원능참봉‚ 의흥‚ 삼가‚ 지례 등의 현감 발령이 있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고 창평산 선영 곁에 집을 지어 한강정사라 이름하고 거기에 거처하면서 제자들을 모아 글을 가르쳤다. 1580년(선조 13년)‚ 38세에 다시 창녕현감으로 발령되어 비로소 부임‚ 1년 반 동안 지방행정에 종사하여 선정으로 생사당이 세워졌다. 그러나 사헌부지평으로 발령됨을 기회로 벼슬을 버리고 귀향‚ 회연 옆에 초당을 마련‚ 천석과 송죽을 사랑하고 특히 매화 100그루를 심어 백매원이라 불렀다. 그 뒤 외직으로 동복‚ 함안‚ 통천 등 고을살이를 거쳐 임진왜란 중에 강릉부사‚ 강원감사‚ 성천부사‚ 그리고 난 후에‚ 충주목사‚ 안동부사 등을 역임하였고‚ 내직으로 교정청 교정랑‚ 동부승지‚ 좌승지‚ 형조참판 등을 거쳐 광해군초에 대사헌으로 특진되었으나 굳이 사퇴하고 나왔다. 선생의 벼슬살이 경력을 보면 내직은 항상 사퇴를 일삼았으나 외직에 대해서는 대체로 부임하였다. 특히 임진왜란 중에 외직을 통하여 국사와 민정에 진력하는 한편‚ 각 지방의 전몰장병을 매장‚ 애도하고 나아가 역사상 외적을 물리친 최춘명‚ 원충갑 등 민족의 영웅들을 위해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기도 하여 당시 군민의 사기를 고무시켜 주었다. 선생은 벼슬에서 물러날 때마다 귀향하여 회연초당에서 제자들과 더불어 학문을 강론하여 후진 교육에 주력하며 저술에 힘쓰고‚ 또한 당대의 명문장가로 글씨도 잘 썼다. 그러나‚ 선생의 만년은 광해군이 형제(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죽이고 모후를 폐하는 등 소동을 당하여 여러 번 상소를 올렸으나 이루지 못했고 북인정권의 횡포 밑에 여러 차례 중상과 모함을 입기도 하여 그의 은퇴지였던 무흘(금릉군 중산면)에서 다시 노곡으로‚ 또다시 사양정사로 이주하여 78세를 일기로 선생의 숭고한 일생을 마쳤다. 선생이 우리 나라의 대현으로 500년 유학사에 뚜렷한 존재가 된 것은 남다른 천품으로 일찍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했던 때문이겠지만 당시 영남 상하도에 자리잡고 있었던 퇴계‚ 남명 두 스승을 찾아 배움을 청했던 것이 중요한 계기였다고 본다. 즉 21세 때에 퇴계에게‚ 그리고 3년 뒤인 24세 때‚ 남명 조식에게 제자의 예를 닦게 된 것이 선생의 일생에 있어서 학문적 정신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 것이라 할 것이다. 퇴계에 의하여 영남 상도는 인을 위주하고 남명에 의하여 영남 하도는 의를 위주했는데 퇴계의 유화를 바다의 넓음에 비한다면‚ 남명의 기절은 산의 높음에 견줄 만한 것이며 이에 이르러 우리 나라 유교적 문화는 그 정점에 도달했었던 것이다. 한강을 연원으로 한 근기학통의 계보는 곧 이조후기의 실학사상의 주류를 이루는 경세치용파 그것이었다. 620년(광해군 12년) 1월‚ 선생이 돌아가자 문목의 시호를 내리고 인조반정 후에 이조판서‚ 효종 때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사림들이 선생을 문묘에 종사를 청하는 글에 선생을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에 이어 교남(영남) 오현으로 꼽았으며‚ 숙종보감에 '중국 사신이 와서 동방심학의 종이 누구냐? 고 묻거던 정한강의 심경발휘가 동방심학의 종이라 답하자고 조정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는 기록은 선생의 학행에 대한 그 시대의 존경을 단적으로 나타내 준다. 1627년(인조 5년)‚ 회연서원을 초당자리에 세워 선생의 위판을 봉안했으며‚ 1690년(숙종 16년)에 사액되었는데 지경재‚ 명의재‚ 양현청 등 건물의 현판은 한석봉의 글씨이며‚ 역학을 새긴 각판이 서원에 보관되어 있다. 서원 앞 백매원뜰에는 신도비가 서 있으며 처음 수륜면 수성동 창평산에 장사지냈으나 1663년(현종 4년)‚ 무덤을 성주읍 금산동 인현산으로 이장했다. 그 밖에 선생을 향사한 서원은 성주의 천곡‚ 창녕의 관산‚ 현풍의 도동‚ 대구의 연경‚ 창원의 회원‚ 안동의 도연‚ 언양의 반구‚ 칠곡의 사양‚ 함안의 도림‚ 성천의 학령‚ 동복의 도원‚ 목천의 도동‚ 충주의 운곡‚ 옥천의 삼양‚ 통천의 경덕서원 등이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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