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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문

정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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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정몽주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정몽주 호 : 달가/포은 활동시기 : 고려시대 출생시기 : 1337년(고려 충숙왕 6년) 상세설명 선생의 자(字)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서기 1337년(고려 충숙왕 6년) 12월에 임고면 우항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고려 수문하시중 일성부원군(守門下侍中日城府院君) 정운관(鄭云瓘) 공(公)이고‚ 어머니는 변한국대부인(卞韓國??人) 영천 이씨(永川李氏)다. 모부인은 아들이 범상한 아이가 아님을 알고 그 교육에 특별한 마음을 써서 장차 대성시키기를 결심한 나머지 다음과 같은 백로가(白鷺歌)를 지어 간곡히 훈계하였다.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마라 성낸 까마귀 흰빛을 새올세라 청강에 잇것 씻은 몸을 더러일가 하노라." 이 시조는 동사절요(東史節要)‚ 가곡원류(歌曲源?)‚ 일성군묘비명(日城君墓碑銘) 등에 실려 있는 시조로서 너무나 유명한 시조이다. 관례(冠禮)후는 선생의 이름을 몽주(?周)라 또 고쳐 불렀다. 선생은 자나깨나 백로가의 훈계를 잊지 않고‚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간직하고 대의(?義)를 굳게 지켜 세상의 물욕에 초연하였다. 또 어려서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여 남다른 재능을 나타내기도 했다. 포은께서는 고려 말엽의 어려운 시기에 처하여 여진족과 왜구 정벌에 문신이면서도 종군하여 국난을 극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을 분 아니라‚ 명나라와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어려운 외교 문재를 오직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큰 성과를 거두어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퇴패(頹敗)한 고려말의 사회상(社會相)을 바로 잡기 위하여 성균관(成均館)에서 경서(經書)를 강의하였는데‚ 그 강설(講說)이 사람들의 의표에 벗어남으로 모두 의심하였더니 그 뒤‚ 고려에 처음 들어온 호병문(胡炳文)의 사서통(四書通)과 포은의 강설한 바가 여합부절(?合符節)하므로 목은 이색(李穡)은 포은이 주자의 성리학(?理學)에 밝음을 극구 찬양하여 '동방이학지조(東方理學之祖)'라고까지 했다. 또 자주가례(朱子家禮)를 준수하고 사당(祠堂)을 지어 부모와 조상들의 제사를 지극한 정성으로 지냈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포은을 존경하는 정도가 융숭하였다. 이방원(李芳遠)은 자기 아버지를 문병(問病)하러온 포은의 속 마음을 알아보기 위하여 술 대접하는 자리에서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萬壽山) 드렁칡이 얽어진들 그 어떠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배견까지 누리리라!" 하고 하여가(何?歌)를 불러 술을 권하였더니 포은은 이에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白骨)이 진토(塵土)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하고 단심가(丹心歌)를 불러 일편단심‚ 충성심만이 있을 뿐이란 것을 보이자‚ 드디어 방원이 포은을 제거할 계획을 짜서 서기 1392년(홍무-?武 25년) 4월 4일‚ 선지교(選地橋)에서 심복(心腹) 조영규(趙英?)등을 시켜서 공을 살해하였다. 이때 포은의 나이 56세였으며 선혈(鮮血)을 흘린 선지교 돌 틈에서는 대나무가 솟아나 그의 충절(忠節)을 나타냈다하여 그 다리 이름을 선죽교(善竹橋)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한다. 자기가 죽을 것을 미리 듣고 알고 있으면서도 충신답게 또 장렬하게 고려를 위하여 최후를 마친 포은은 어릴 때 부모님으로 받은 교훈을 평생토록 굳게 지켜서 마침내 만고에 빛나는 충신이 되었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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