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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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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정사현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정사현 호 : 희고/월담 활동시기 : 조선시대 출생시기 : 1508년(중종 3년) 상세설명 진양인 정사현 선생은 1508년(중종 3년) 9월 13일 참봉 린공과 나주박씨 충순위귀간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는 희고이며 호는 월담이다. 어린시절에는 사현(??)이였으나 자라서 사현(師賢)이라 고쳐불렀다. 선생은 고려 현종조의 병부상서 금자광록대부 진양부원군 은렬의 후손이며 또한 증조부는 중훈대부 영광 군수 경공이다. 조부는 원신공 인바 생원이며 한성참군을 지낸바 있어 대대로 벼슬을 한 문중이다 진양인 정사현 선생은 1508년(중종 3년) 9월 13일 참봉 린공과 나주박씨 충순위귀간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는 희고이며 호는 월담이다. 어린시절에는 사현(??)이였으나 자라서 사현(師賢)이라 고쳐 불렀다. 선생은 고려 현종조의 병부상서 금자광록대부 진양부원군 은렬의 후손이며 또한 증조부는 중훈대부 영광 군수 경공이다. 조부는 원신공 인바 생원이며 한성참군을 지낸바 있어 대대로 벼슬을 한 문중이다. 어릴 때부터 보통 아이와 달라 지성없이 놀지않고 웃음과 말이 적은 편이며 범사에 심중을 기하기에 실수가 없고 진실되었다. 나이 겨우 아홉 살때에 충효와 문장이 남달리 뛰어났고 진리탐구에 열중한다는 소식을 듣고 문정공 조남명선생이 듣고 생각한바 있어 매부로 삼으니 정열부인 창녕 조씨이며 승문원교리 언형의 따님이다. 그로부터 선생은 남명선생의 문하생으로써 깊은 학문을 배워 왔으며 남다른 총명으로 더욱 깊은 진리를 터득하였다. 선생은 이조판서 이준민공과 가까운 인척인데 한번은 선생을 조정에 추천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월담선생은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추천을 거절하는 동시 이준민과 같은 세도가와는 절교를 할 정도로 그의 성격은 그야말로 대쪽 같았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실력으로 해 내겠다는 것이며 남의 도움이나 협력과 동정 같은 것은 결코 배격하였다. 남명선생과 더불어 한강선생과 또한 구암선생과 같이 선생은 향정에 자주 모여 도의를 강마하고 학문을 연구하며서 인과 지를 낙으로 삼았다. 선생은 명종조에 징사함을 동현호록에 기록되어 있다. (징사라 함은 과거를 보지 않고 초야에 묻혀 있는 학득높은 분을 왕명으로 조정에 출사한 것을 말함) 선생이 9살때였다. 아버지가 갑자기 우중한 병에 걸려 눕게 되자 선생은 크게 염려하여 침식을 전폐하면서 아버지의 병환을 돌보았다. 병이 위중하게 되자 선생은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렸으며 대변을 맛보기도 했다. 정성을 다해 간호한 보람도 없이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그후 선생은 홀로 계신 어머님께 대한 효도는 더욱 지극하여 온 마을 사람들이 그 어린 효심을 보아 장차 커서 나라에도 총성할 큰 인물이 될 것을 크게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후에 어머님 마저 병석에 눕게 되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선생은 온갖 의원과 약을 쓰면서 하늘에 빌기를 [어머님대신 차라리 내가 죽기를 원합니다.] 는 애절한 소원으로 비니 하늘이 감동함인지 어머님의 병환이 차차 치유되었는데 이를 본 온 마을사람들이 이르기를 [이는 하늘이 아는 효성]이라고 하였다. 선생은 집 남쪽에 향정을 짓고 남명선생과 여러학자들과 함께 진리탐구와 공부를 계속 하였는데 이 향정이 곧 월담정이며‚ 그앞에 아담한 연못을 만들고 온갖 화초를 심어 심히 아름답게 만들었는데 그 연못이 바로 지금의 고령여중종고 교정자리이다. 선생은 1555년(명종 10년) 48세의 한참 일할 나이에 돌아갔으니 이 얼마나 애석한 일이랴. 세상을 떠나기전 선생은 3남 1녀를 부르고 그 수족을 깨끗이 씻게 하고는 누워 그 자녀들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이제 간다. 명이 길고 짧음은 하늘에 있으니 내가 죽는 것은 유김이 없으나 그러나 가장 한이 됨은 아직도 어머님이 살아 계시는데 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다니 따스한 봉양을 누구에게 맡기랴. 부디 너희들이 내 뜻을 받들어 있는 정성 다하여 어머님을 잘 섬기라]하고는 옆에 있던 부인 조씨에게 말하기를 [여보 이제 나는 가니 내 죽은 뒤에 당신이 어머님을 잘 받들되 내 생시와 조금도 다름없이 한다면 나는 지금 죽어도 눈을 감겠소]하고는 크게 입을 열어 글 한수를 외어 가로되 육팔년광인세촉하니 만강충효유수지라 즉[6‚ 8 년광(6×8=48)이 인생을 재촉하니 못다한 이 충효를 그 누가 알아주리]하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선생의 묘소는 고령읍 지산동 황정산에 있다. 선생의 이 빛나는 얼을 길이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1977년 10월 고령읍 지산동 월담선생 묘소 부근에다 총 높이 5m 되는 거대한 유적비를 세웠는데 비문은 화산 권용현 선생이 지었다. 또한 황산재(당시는 월담정)는 본래 월기에 있었던 것을 현재장소(고령읍 지산동 344의 1번지)로 옮기면서 [황산재]라 부르게 되었으며 기문에는 남명 조선생과 도사 전의인 이종기 선생이 만들었고 정사시는 한강 정선생 구암 이선생이 지었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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