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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문

정석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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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정석견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정석견 호 : 덕용‚자건/한벽재 활동시기 : 조선시대 상세설명 공은 해주인 현감 유공의 아들로 개령 탄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덕용·자건이라 했고 호는 한벽재였다. 1423(경종 3)년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474(성종 5)년 문과에 급제한 후 내외의 여러 관직을 거쳐 1497년에는 이조판서에 오른 분이다. 공이 이조정랑이었을 때(1489)‚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산정한 바 있고‚ 지례 김산·비안 등지의 지방관으로 재직시는 공사에 엄정하고 애민하여 이속은 두려워하고 군민은 그 덕을 기려 노래로 할만큼 선정을 베풀었다 한다. 공은 특히 성품이 곧고 의리에 밝았지만 작은 예절에 얽매이지 않는 큰그릇이었다 한다. 일찍이 옥당에서 공부할 때의 일화가 있다. 본래 옥당에는 나라에서 내린 하인은 없고 선노 하나만 있었던 관계로 다른 관서에서 하인을 빌어 쓰고 있었는데‚ 공은 응교가 되었어도 홀로 하인을 빌지 않고 납패만 걸고 조졸이 앞을 인도하고 공은 말을 타고 가운데 서 뒤에는 종 하나가 따를 뿐이었다. 이를 본 길 가던 사람들은. '산자 관원!(조졸과 공‚ 하인이 묏산자를 이뤘다고)'이라 일컬었는가 하면 심지어 허세를 부리던 동료들은 공의 가식할 줄 모르는 성벽을 비웃기까지 하여‚ "한 하인을 비는 일이 그 무슨 의리에 해롭기에 체통을 잃고 이렇게까지 하시오?"하니‚ 공은 웃으며‚ "남에게 하인을 비는 것은 눈앞의 일이고‚ 호위하고 따르는 자가 많고 적은 것은 등뒤의 일인데‚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 남에게 구걸하는 일은 나는 싫소!" 하여‚ 듣는 사람들도 그 뒤로는 감히 함부로 농담하지 못했다 한다. 이만큼 선생은 가식 없는 생활을 했을 뿐 아니라 불의에는 과감히 맞서 포악무도한 연산군 조차 그 뜻을 꺾지 못한 일화가 있다. 즉‚ 1498년 무오사화 때는 김종직의 문집을 편찬했다 하여 투옥 당한 적이 있는데 연산군 앞에서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임금 앞에 꿇어앉아 눈물로 호소하기를‚ "신은 이미 늙은 몸이라 저 고문에 목숨을 부지할 수도 없으려니와 또한 목숨이 아까운 것은 아니옵니다. 다만 죄 없는 신하를 죽임으로 뒷날 조정의 누가 될까 그것이 심히 안타까울 뿐이옵니다." 하여‚ 포악한 연산군도 그 당당한 의기를 가상히 여겨 석방시켰다고 한다. 또한 선생은 이름난 선비인 두 형 철견·은견과 더불어 학문에 정진하여 점필제 김종직·한훤당 김굉필·매계 조위 같은 대학자들과 두터운 친교가 있어 향토의 학풍을 진작시키는데만 그친 것이 아니라 영남학파의 신진 사류에게 끼친 영향도 참으로 컸다. 관직에 있은 찌 수십년에도 은퇴 후에는 집안이 청빈했다 한다. 1500(연산 6)년에 작고하여 그 묘소는 감문면 탄동에 있으며 강제지(?霽知) 찬(撰)의 묘갈(墓碣)이 섰고 화상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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