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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문

정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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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정세아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정세아 호 : 화순/호수 활동시기 : 조선시대 본 관 : 오천 상세설명 선생의 자(字)는 화순(和淡)‚ 호(號)는 호수(湖 )‚ 관(貫)은 오천(烏川)이다. 조상 대대로 영천에서 살아온 사대부 가문으로 퇴계문에 수학하여 학명을 떨쳤던 아버지 노촌 정윤량(魯村鄭允良)의 대를 이어 일찍 진사가 되었으나 나라의 의논이 어지러움을 걱정하여 요승 보우(普雨)를 처단하도록 솟장을 올려 몰아내는데 협력하였으며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일생을 자양 산장의 강호정사(江湖精舍)에서 제자들을 기르며 학문을 닦아 덕망이 높았던 선비였다. 그러나 그가 58세가 된 1592년(임진년) 4월 13일 왜적들이 쳐들어왔다. 부산에 상륙한 왜적들은 구름처럼 퍼져서 북으로 올라가며 거리낌 없는 것처럼 남도의 수십개 성을 빼앗고 4월 23일에는 영천성에 쳐들어왔다. 선생은 책을 덮고 나라에 몸바칠 것을 결심하고 일어섰다. 의번(宜藩)‚ 안번(安藩) 두 아들과 제자들을 데리고 의병을 모으니 며칠 안되어 상민 승군이 200여‚ 향반의 의사가 700여‚ 합 900여 명이 모였다. 이윽고 5월 25일에 각읍 의장들에게 청원을 하고‚ 29일에는 문천(蚊川)에 모임을 갖고‚ 6월 7일에는 금오산곡(金鰲山谷)에 진을 치고 관군과 경주진은 남천(南川)에 진을 치고 언양에서 올라오는 왜적 400여 명을 베이었다. 이때 영남의 열읍 의진은 4200여의 병력이요‚ 왜적도 수천이 영남에 머물렀다. 다시 6월 19일에는 문천에서 회맹을 하여 싸움을 의논했고‚ 7월 23일에는 영천성을 탈환할 준비로 군남추평에 진을 치고 화공할 장비를 서북문밖에 쌓게하고 성을 넘을 긴 사리....등을 갖출 때 신령 의병장 권응수‚ 신령 현감 한척‚ 의흥 의병장 홍천뢰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왔으며‚ 24일에는 하양 의병장 신해‚ 하양 현감 조윤신‚ 자인 의병장 최문병‚ 경산 의병장 최대기‚ 경주판관 박의장 등이 각각 군사를 거느리고 모이니 총수가 3560여 명이고 의성감사졸(결사대) 500여 명이 합세하니 4000이 넘는 장졸이었다. 그리하여 다른 고을의 의진들은 지리에 낯설기 때문에 서북편을 맡게하고 영천의 의병들은 싸우기가 어려운 동남쪽의 금호강 절벽을 맡아서 때가 이르기를 기다렸다. 7월 27일 새벽에 때마침 바람이 크게 일거늘 바람을 이용하여 마현산 산마루에서 모래와 재를 날려 적진을 요란케 하고 화공을 하고 의사들은 사방에서 성문을 깨트리고 왜적을 대파하니 남은 적들은 강을 건너 경주로 달아났다. 영천성을 다시 찾은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제일 큰 반격전이요‚ 승리였다. 이로서 경상조도로 올라가던 왜구들은 보급로가 끊어지니 그들은 곤궁에 빠졌다. 전후에 그 공을 의논할 때 선생은 "우리들이 우리 성을 다시 찾음은 당연한 일이다"하고 공훈을 받지 않았다. 8월 21일에는 경주성을 치기 위하여 경주 서천으로 나아갔다. 영천진은 서문을 맡아 공격하여 제일 먼저 성에 들어갔으나 북문으로 밀려나간 왜적들이 서문을 밖에서 포위하므로 우리 영천의 진은 성안에 갇혀 많은 의사들을 잃었다. 선생도 성안에 갇혀 고전분투했으나 그의 맏아들 의번(宜藩)이 종억수(億壽)와 함께 번개 같이 전사하고 말았다. 그후에 다시 경주 복성전에 참전하여 설욕을 풀었으나 아들을 비롯하여 당시 함께 순절한 부하 장졸들의 시신을 찾지 못하여 옷과 신발과 시를 지어 묻어서 장례를 지내주었다. 그 후에도 줄곳 여러고을에서 적을 무찔렀다. 그러나 나라의 기틀이 바로 잡히자 공과 벼슬을 사양하고 자양 서재로 돌아와서 다시 학문의 깊은 경지를 찾았다. 나라에서는 몇 차례나 벼슬이 내렸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가 오리 이원익의 청을 이기지 못하여 황산도찰방을 잠시 지내고 돌아왔다. 난리 중에 불타버린 임고서원을 다시 짓고 허물어진 인심을 다스리고 예를 숭상하여 향풍을 바로 잡으니 고을이 모두 그의 덕을 따랐다. "여러산이 에워싼 한 시내 머리에 몇가지의 솔처마는 여름도 가을이네‚ 자연을 사랑하며 한가로운 시귀절에 세월의 걱정일랑 취중에 잊어보세‚ 하잖은 내일생은 구름따라 떠나가고 가벼운 이 한몸이 강물따라 흘러가네‚ 나물국밥 조촐해도 배부릴수 있으리니 다시는 걱정말고 부생에 맡기리라." 이 시를 보아도 그의 높은 심경을 알 수 있다. 정승 오리 이원익의 방문에 이어 금계 황준량(錦溪黃俊良)‚ 창석 이준(蒼石李埈)‚ 지산 조호익(芝山曺?益)‚ 여헌 장현광(旅軒張顯光)‚ 모당 손처눌(慕堂孫處訥)등의 방문으로 학론을 교 환하며 조용히 여생을 마쳤다. 후에 충효가문으로 정려가 내려 자헌대부에 병조판서겸 지의금부사로 시호가 강의공(剛義公)으로 내렸으며‚ 대환의 세덕사(世德祠)에서 제향을 받들고 있다. 그의 예집 대전종택은 문화재 85호요‚ 학문을 닦은 강호정(江湖亭)은 자호정사(紫湖精舍)라고도 하며 문화재71호이며‚ 그 묘재인 하천재(?泉齋)와 호수선생 신도비도 문화재 73호로 지정‚ 선생의 높은 덕을 기리고 있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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