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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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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정의번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정의번 호 : 위보/백암 활동시기 : 조선시대 출생시기 : 1560년 상세설명 선생의 자는 위보(衛甫)요‚ 호는 백암(柏巖)이다. 서기 1560년 자양면 노항동(현 영천댐 안의 수몰지)에서 호수(湖 ) 정세아(鄭世雅)선생님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호수공께 글을 배우기 시작하자 항상 글방에 거처하면서 밤낮으로 글 공부에 힘쓰니 나날이 글재주가 늘어 뭇 어른들의 칭송을 한 몸에 받았다. 어버이의 명령으로 향시에 응하여 장원이 되었다가 다음 해 서기 1585년(선조 18년) 가을에 생원과에 합격하였다. 그때 나이 26세였다. 시관이 공의 글을 보고 "이치에 소명한 글이라"고 극구 칭찬하였다 한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돌발하여 여러 고을이 함락됨에 공은 부모를 모시고 일시 기룡산 밑으로 피난하였다. 두 아우 안번(安藩)‚ 수번(守藩)과 더불어 소금과 쌀을 수 백리 밖에서 져다가 조석의 봉양을 하였다. 이에 호수공이 공에게 말씀하시기를 "지금 임금님께서 몽진하시고 나라의 위태롭기가 조석에 달렸으니 신자(臣子)된 사람이 어찌 편안하게 앉아 볼 수만 있겠느냐?"하고 사기를 격동시켜 의병을 모집하니 고을 사람들이 차차 이에 응하여 강력한 의병이 조직되었다. 공은 항상 아버지를 모시고 있어서 기묘한 대책을 세워 왜군을 지금의 화산면 석촌(花山面石村) 박연(朴?)에서 권응수(權應銖)‚ 정대임(鄭?任)등의 의병장과 같이 쳐서 크게 이겼다. 이것이 임진 5월 15일의 일이다. 또 임진년 7월 27일은 각 고을에서 모여든 여러 의병들과 동심 합력하여 바람을 이용해 불을 질러서 전국에서 맨 먼저 영천성을 적으로부터 탈환하여 영천성을 점령하고 있던 왜병들을 수십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무찔러 죽였다. 영천성을 탈환한 여세를 몰아 5천여명 의군의 선봉장이 된 호수공을 옹위하여 경주성을 탈환하는 대격전에 백암공도 참전했다. 앞뒤에 적의 공격을 받게 된 아군들은 당황하기 시작하였다. 원수(元帥)인 박진(朴晉)이 잠시 후퇴하자. 아군이 와해되기 시작했다. 이바람에 공은 호수공과 헤어지게 되고 그 소재를 찾아 헤매게 되었다. 호수공을 발견하지 못하자 공은 분연히 칼을 휘두르며 포위를 뚫고 들어치니 적병이 무너지는지라‚ 호수공은 이통에 포위를 벗어났으나 공은 이것을 전연 모르고 온몸이 창에 찔려‚ 피투성이로 적진 속을 호수공을 찾아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이렇게 적의 진영을 드나듬이 무려 세 차례나 되었다. 마지막 회에는 말에 힘껏 채찍질을 하여 적중에 뛰어 들어 굳센 활로 적을 쏘니‚ 쏘는 족족 적이 맞아 쓰러졌으나 화살은 다 되고 활 또한 꺾이고‚ 거기에다 타고 있던 말조차 적탄에 맞아서 쓰러졌다. 적이 무기로 공을 위협했으나 공은 분연히 꾸짖어 욕하며 굽히지 않고 죽으니 이 날이 바로 임진년 8월 20일이라‚ 듣는 사람마다 놀라고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호수공이 사후에‚ 공이 평소 입던 옷과 갓으로 경주 싸움터에 가서 초혼해 와서 빈소를 지어 통곡하고 또 당시에 서로 마음을 통하던 지우들에게 애사(哀詞)를 구해서 관에 넣어 시체 대신 선영의 곁에 장사 지내니 이것이 이른 바 기룡산(騎龍山)기슭의 시총(詩塚)이다. 그 후 서기 1784년(정조 8년) 2월에 "충효각"을 영천군 임고면 선원동(永川郡臨皐面仙源?)에 왕명으로 세우게 되어 오늘에도 그 충효를 경모하게 되었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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