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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문

정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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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정탁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정탁 호 : 자정/약포 활동시기 : 조선시대 본 관 : 청주 출생시기 : 1526년(중종 21년) 상세설명 임란을 수습한 명재상이다. 세상이 어지러울 때는 많은 충신과 간신들이 명멸하나 그 숱한 인물 속에 향토 출신 약포선생은 자랑스러운 위치를 차지한다. 임진왜란(1592년-1597년)중에는 선조임금과 왕세자(광해군)을 모셨으며 난이 끝나자 좌의정‚ 영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여 난후 수습에 온 힘을 기울인 재상이다. 공은 난중에 곽재우‚ 이순신‚ 김덕령 등 명장을 천거했으며 그들이 당쟁의 희생으로 죽음에 직면했을 때 빠른 판단과 상소로써 그들은 구해낸 공적은 역사가 있는 동안 길이 기억해야 할 것이다. 공은 1526년(중종 21년) 예천군 용문면 버들밭(하금곡동)에서 이충(以忠)의 아들로 태어나니 본관은 청주요‚ 자는 자정(子精)이며 호는 약포(藥圃)다. 공은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어려서부터 총명이 남달라 여덟 살에 벌써 글을 깨쳤으며 경사(經史)‚ 지리(地理)‚ 병서(兵書) 등에 두루통해 믿음으로써 행하고 지조가 맑아 50년간의 벼슬길에서 조금의 실수도 없었으며 극심한 당쟁 속에서도 초연했고 포용성이 있어 대인관계가 원만해서 동인(東人)에 속하는 그였지만 서인의 영수인 오음 윤두수와 교분이 매우 두터웠다. 1552년(명종 7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8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1566년 정언(正言)이 되고 1568년(선조 1년) 교리(校理)로 춘추관 기주관을 겸직하여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1581년 대사헌이 되었으나 정인홍‚ 박광옥 등과 뜻이 달라이조참판으로 전임되고 이 해에 진하사로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이듬해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고 1589년 우찬성으로 사은사가 되어 다시 명나라에 다녀 오면서 임란 직전의 명나라와의 외교에 힘을 썼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좌찬성으로 선조를 의주까지 모셨다. 1593년(선조 26년) 영위사(迎慰使)가 되어 명나라의 장수들을 영접했으며 계속 그들과 사귀면서 전란 중의 국교에 노력하고 명나라 군사의 진중을 돌면서 그들의 사기를 높이고 독전했다. 왕세자 광해군의 스승으로 임란 중에는 평북 강원 함경도 등을 전전하면서 세자를 보필했도 서울 수복 후에는 기위사로 철수하는 명나라 군사를 의주까지 가서 전송했으며 그 해 10월 용만문견록을 지어 선조에게 올렸다. 용만문경록은 선조가 의주로 몽진할 때의 상황과 명나라 장군의 내왕을 맞고 보낸 일이며 그들과 주고 받은 문서 등을 기록하여 선조가 사정을 알도록 한 기록이다. 당시의 군사‚ 정치‚ 외교‚ 사회상을 알게 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한편 약포는 세자와 함께 영남과 호남 등지에서 근왕병을 모집 훈련시키면서 난민 구제에 힘썼다. 1594년 우의정이 되었고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싸움터에 나가 군사들을 독전하려 했으나 선조 임금은 연로하다고 만류했다. 그 해 2월 원 균의 모함을 받은 이순신이 서울로 잡혀 왔을 때 재상들은 이순신이 무고한 줄 알면서도 변호하지 못하고 6‚7차에 걸친 중신회의에서 이순신을 비호하던 중신들마져 반대파의 집요한 모함을 두려워하여 입을 다물었을 때 약포 혼자 끝까지 이순신의 출중한 무예와 인격을 논하여 다시 종군시키라고 역설하여 처형 직전에서 목숨을 구하여 백의종군케하고 명량대첩의 큰 공을 세울 수 있게 했으니 이것이 저 유명한 신구차(伸救箚)다. 1600년(선조 33년) 좌의정 3년 후 영중추 부사로 난 후 수습에 온 힘을 기울이다가 노년으로 벼슬을 물러나 향리 예천으로 돌아와 보문면 고평도에 터를 잡았다. 약포는 여기서 고평동계(향약)을 만들어 백성을 교도했으며 사회 풍교의 확립에 힘을 기울였고 고평 들을 개척하여 향토 주민의 복지 증진에 정성을 쏟기도 했다. 1604년 선조는 약포의 공을 기려 호성공신으로 서원부원군을 봉하고 충훈부에 하교하여 영정을 그려 하사했고 1605년 80세를 일기로 서거하니 선조 임금은 3일간 조회를 폐하고 슬퍼했으며 재문을 내렸고 서울 백성들은 철시(撤市)하고 통곡했다. 지금 고평동에 있는 약포 유물각에는 영정을 비롯하여 연적‚ 벼루‚ 용사일기‚ 문집‚ 기로연도‚ 갓‚ 용사잡록(龍蛇雜錄)‚ 교지 등 많은 유품이 보물로 지정되어 전시되고 있다. 참고문헌 : 명종실록‚ 선조실록‚ 약포연보‚ 연려실기술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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