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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위(曺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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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조위(曺偉)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조위(曺偉) 호 : 대허/매계(梅溪) 활동시기 : 조선시대 출생시기 : 1454년(단종 2년) 출 생 지 : 1454년(단종 2년) 시대 : 조선시대 상세설명 조위선생은 자는 대허라 하고 호는 매계라 하니 세칭 매계선생으로 불리운다. 선생은 1454년 (단종2년 갑술) 봉산면 인의동에서 울진현령 계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의 할아버지가 심인데 여말의 고려의 국운이 상잔하여 다함을 한하여‚ 김산(현 김천)으로 낙향한 창녕조씨의 김산 이향조가 되며‚ 음으로 산원을 지냈으나 30세로 조세하고 뒤에 병조참의로 증직되었다 선생의 증조부는 단성좌명공신으로 서성군에 봉해진 밀직부사추봉 의정부좌찬성 경수이며‚ 고조부는 판전의 사사 중 문하시중 창성부원군 우희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재주와 생각이 특이하여 동생 적암 신과 같이 말을 배우면서부터 글자를 알고 7세때 능히 시문을 지어 이름이 났으니 이 때의 사람들이 매우 기이하게 여기고 그 장래가 크게 기대된다 하였다. 선생은 10세때 영남사림의 종사이자 매형인 점필재 김종직에게 글을 배워 학업이 일취월장 하였고‚ 11세대 종숙부인 영의정 충간공 석문에게 소학을 친수받으니 충간공이 매우 기특하게 여겨 그 장래를 촉망하고 가숙에 머물게 하여 경서의 이치와 학문하는 방법을 가르치었다. 선생은 충간공의 집에서 18세때 성균관 생원진사시에 합격하고‚ 21세때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곧 바로 승문원 정자를 배하고 다음해 예문과 점열을 배하였다. 1497년(성종 10년) 선생 26세 때 홍문관 부수찬으로 배하였는데 이때 영안도(함경도) 삼봉도의 난민을 초유코저 경차관을 선발하는데 조정에서 그 인선에 있어 의논이 분분하였다. 이때 성종께서 "조위가 비록 나이는 어리나 천품이 절륜하고 현명하다."하고 선생으로 하여금 영안도경차관을 임명하였으나 과히 선생의 기량과 인품을 짐작할 수 있다 하겠다. 다음해 경차관에서 돌아온 선생은 성종의 두터운 지우를 받아 검토관 시독관 등으로 경연에 나가 성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고 여러차례 어진시제에 늘 장원을 독차지하여 성종께서 "문예에는 조위가 제일이고‚ 무예에는 임득창이 제일이다." 하고 포상과 특진을 거듭 내렸다. 이동안 성주사고의 검열관을 지내고‚ 명나라 칙사의 원접사 강희맹의 종사관을 지내기도 하였다. 1481년(성종 12년 신축) 선생 28세때 홍문관 수찬으로 있었는데‚ 이때 성종께서 당나라의 시성 두보의 시를 언어하는 책임을 선생에게 맡겼다. 이에 선생께서 승 의침과 여러 성균관의 관료들과 심혈을 기울여 분유두공부언해를 25권 17책으로 완성하고 그 시문을 썼다. 이것이 두시언해 초간본으로 우리나라 고문‚ 고어 연구에 있어 국문학사상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는 것이며‚ 값진 조상들의 유산으로 높이 평가 받고 있는 문헌이다. 그러나 전질이 전함이 없으니 학계에서 안타까워하고 있으며‚ 인조 10년 인간된 중간본은 전질이 전하여 오고 있다. 당시의 학자들이 한문만을 숭상하고 우리의 그을 천대하던 때 선생과 같이 국문에 뛰어난 조예로 유창한 필치와 충분한 어휘로 다듬어진 번역은 영구히 국어국문학의 소담한 밑천으로 겨레와 더불어 찬란할 것이다. 이 "두시언해"는 국정교과서 등에 교재로 등재돼있다. 다음해 선생은 사헌부 지평을 서생 30세때 세자 시강원이 설치되니 선생으로 하여금 시강원 문학을 삼았다. 이는 원래 노성한 학자를 임명하는 것이 통례인 바 선생을 임명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발탁 이었으니 선생의 학문의 도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한편 이해 가을 명나라 사신을 따라 온 문사 갈귀라는 사람은 매우 학문 높았다. 이때 성종께서 선생과 사신을 그와 함께 놀게 하여 그의 학문을 살펴보게 하였다. 그후 우리 나라에서 명나라에 사신이 갔을때 갈귀가 선생의 안부를 묻고‚ 선생의 학문이 높음을 찬양 하였다 한다. 1484년(성종15년) 선생은 친노를 이유로 사직코자 하였다. 그러나 성종이 윤허하지 않고 고량 근처인 함양군수로 전보하였다. 군수로 재임하는 동안 학문을 진낙시키고 인재양성에 힘쓰고 그 다스림이 어질고 너그럽고 간결 검소함을 근본하여 선치로 이름났으며 때마침 부상을 길하여 함양에 와있던 정여창과 어학강도 힘쓰니 그 문화가 울연하였다. 선생이 1491년 38세때 상을 벗고 상경하니 당일로 의정부 검상에 임명되고 이어 사헌부 장령을 지내고 승정원 동부승지에 올랐다. 다음해 좌부승지‚ 우승지를 거쳐 도승지가 되었다. 1492년 (성종 24년) 선생 40세때 가선 대부 호조참판을 배하였다. 이때에 성으로부터 전제 김종직 문집을 찬집하라는 명을 받았는데 이 문집을 편찬하면서 점필제가 지은 조의제문을 문집에 수록한 바 있었다. 이 일로 인하여 뒤에 무오사화때 선생이 연좌되어 화를 입는 원인이 되었다. 같은 해 직제학을 명하고 정조사로 명나라에 사행할 것을 명하였으나 모친의 연로함을 들어 사임하였다. 이 무렵 고향집 시냇가에 초당을 짓고 계단을 쌓아 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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