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검색

  • 이미지 유형

라이선스 유형

이미지

목판

추천0 조회수 17 다운로드 수 0 일반문의
  • 해당 공공저작물은 외부사이트에서 보유하고 있는 저작물로써, 원문보기 버튼 클릭 시 외부사이트로 이동됩니다. 외부사이트의 문제로 인하여 공공저작물로 연결이 되지 않는 경우에는 사이트 바로가기 를 클릭하여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저작물명
목판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2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나무판에 글자를 뒤집어 새긴 책판이다. <발달과정/역사> 한국에서 확인된 최초의 목판인쇄는 704∼706년의 신라 성왕(聖?) 때 인출된 것으로 추정되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光?陀羅尼經)》으로 한국에서 최초의 목판인쇄물일 뿐만 아니라 세계 최초의 인쇄물이다. 신라의 목판인쇄술은 고려에 전승되어‚ 1007년(목종 10) 총지사(摠持寺) 주지가 조각해서 인출한 《총지사보협인다라니경(摠持寺寶印陀羅尼經)》은 실감이 나는 불화(佛畵)의 모사(模寫)와 정교한 도각(刀刻)으로 이루어진 고려 목판인쇄의 정화(精華)이다. 고려의 목판인쇄는 1011년(현종 2) 이후의 《초조대장경(初雕?藏經)》‚ 91년 이후의 《속대장경(續?藏經)》‚ 1237년(고종 24) 이후의 《재조팔만대장경(再雕八萬?藏經)》에 이르러 절정에 달하는데‚ 이들 《대장경》은 거란 및 몽골의 침입을 받고 국난을 불력(佛力)에 의해 극복하려는 서원(誓願)에 따라 국가사업으로 이룩된 것이다. 고려의 목판인쇄는 11∼12세기 초까지 크게 발전하여 닥나무 껍질에 의한 용지 제조술‚ 소나무 그을음에 의한 송연묵 제조술 등 관련 산업도 발달하였다. 또 그 보급은 중앙뿐만 아니라 지방의 관청 및 민간에도 미쳐 성행하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목판인쇄는 꾸준히 행하여져 1458년(세조 4)에는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다시 인출하는 큰 사업을 벌였다. 조선시대에는 이렇게 관에서 인출한 관판본(官板本)보다 사찰판(寺刹板) ·서원판(書院板) ·사가판(私家板) 등으로 구분된 사판본(私板本)이 성행하여‚ 조사된 바에 따르면 불전(佛典)을 조각한 사찰이 120‚ 여기서 인출된 사찰판본만도 284종에 이른다. 사가본은 저자의 자손 ·문인(門人)이 그의 조상 및 스승의 시문집을 사비로 출판한 것이 많았는데‚ 약 50∼60년 만에 1번씩 씨족이 공동부담으로 출판한 족보도 사가판의 일종이다. 그러나 주자인쇄(鑄字印刷)가 활발해지고 불교가 억제되면서 관판본은 점차 사라지고‚ 사가판이 명맥을 유지하였다. 목판은 오래 간직하며 무한정으로 찍어 낼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비용‚ 시간‚ 품이 많이 걸리면서도 오직 한 문헌만을 찍어 낼 수 있는 것이 그 단점이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이 목판은 길이 30㎝‚ 폭 3㎝‚ 높이 4.7㎝의 마구리를 두고 길이 40.1㎝의 나무판을 끼워 만들고 글자를 양면에 새겨 넣었다. 마구리에서 3.7㎝의 간격을 두고 광곽(匡郭)을 새겨 넣고 그 안쪽으로 계선(界線)을 마련해 두고 그렇게 생긴 공간 속에 글자를 새겨 넣었다. 글자판의 중앙에는 판심(版心)이 배치되어있는데 어미(魚尾)를 위아래로 새기고 그 사이에 판심제(版心題)를 새겨 놓았다. 먼저 앞면을 보면 판심에 「안릉삼고권삼 청계유고(安陵三稿卷三 ?溪遺稿)」라는 판심제가 새겨졌고 그 아래에 ‘삼(三)’이라고 장차(張次)가 새겨져있다. 뒷면에는 「안릉삼고권삼 청계유고(安陵三稿卷三 ?溪遺稿)」라는 판심제가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는 ‘사(四)’라고 장차가 새겨져있다. 내용은 ‘청계(?溪)’라는 호를 쓰는 사람이 죽은 후 그가 남긴 글을 모은 것이다. <참고문헌> 청주고인쇄박물관‚《옛 책의 아름다움》‚ 2004.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05.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