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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철화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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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백자철화지석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2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죽은 사람의 인적사항이나 무덤의 소재를 기록하여 묻은 판석(板石)이나 도판(陶板). <발달과정/역사> 지석의 유래는 중국 삼국시대인 위(魏)나라에서 역대 황제릉을 세울 때 지나친 노동력과 물자의 낭비를 초래하였기 때문에‚ 석실·비석·석수(石?) 등의 석물을 일절 금지하면서부터 비석 대신에 개석(蓋石)과 저석(底石)으로 된 판석에 지문을 새겨서 묻은 데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묘지는 언제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서기 357년 고구려의 동수묘지가 있고‚ 5세기 중엽의 모두루묘지가 있다. 또한 매지권(買地券)으로 알려진 백제의 무령왕릉(6세기 전반)에서 나온 자료도 같은 종류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우리나라에서는 적어도 삼국시대 중반 이후부터는 지석이 사회적으로 높은 계층에서 사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현재까지 100여 점이 정리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상당수가 묘 속에 아직 묻혀 있을 것으로 보아 상당히 많이 퍼졌다고 하겠다. 지석에는 본관과 이름‚ 조상의 계보‚ 생일과 죽은 날‚ 평생의 행적‚ 가족관계‚ 무덤의 소재와 방향 등이 기록되어 있다. 재료는 고려시대까지는 대부분이 돌로 되어 있는 데 반해서‚ 조선시대에는 자기로 된 것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 밖에 돌·흙·석회·종이로 만든 지석도 발견되고 있다. 자기로 된 지석조차도 백자·청자·분청사기 등으로 구분되나‚ 백자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조선 후기로 내려오면서 석회나 흙을 네모진 조각으로 구워 만든 것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일반적인 형태와 특징> 모두 13개로 이루어진 백자 판형지석(板形誌石)으로 표면에 철화(鐵畵)기법으로 묘지(墓誌)를 썼다. 묘지에는 표지의 주인공이 가선대부(嘉善??) 김형수(金亨?)이고‚ 그의 본관(本貫) 및 가계(家系)‚ 몰년대(沒年代)‚ 배우자(配偶者) 가계(家系) 및 몰년대(沒年代)‚ 묘지문(墓誌文)의 찬자(撰者) 및 서자(書者)‚ 지석(誌石)의 제작년대(製作年代) 등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지석의 제작연대는 피장자가 몰(沒)한지 4년 후인 1838년이며‚ 홍현주(?顯周)가 찬(撰)하고‚ 이익회(李翊會)가 서(書)하고 있다. <참고문헌> 박한설‚<한국묘지에 관한 연구>‚《인문학연구》16‚ 강원대학교‚ 1982. 최호림‚<조선시대 묘지의 종류와 형태에 관한 연구>‚《古文化》25‚ 1984.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05.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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