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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자귀얄인화문대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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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분청자귀얄인화문대접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2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대접이란 국이나 숭늉 따위를 담는 데 쓰는 위가 넓고 운두가 낮은 모양의 그릇을 말한다. 사발보다 더 크며 국이나 국수 등을 담는 용기를 대접이라고 한다. 또는 대첩(?貼)으로도 쓰인다. <발달과정/역사> 대접모양의 그릇은 빗살무늬질그릇 시대의 발형도기(鉢形陶器)에서부터 등장하고 있다. 삼국시대의 고분에서 출토된 청동제 완(椀)은 형태면에서 고려와 조선시대의 청자·백자에 이어져 현재에 이른다. 오늘날에는 사기·놋쇠·알루미늄·스테인리스·합성수지 등 다양한 재질로 만들어져 사용되고 있다. 분청사기란 말은 1930년대 고유섭(高裕燮:1904 - 1944)이 당시 일본인들이 사용하던 ‘미시마(三島)’ 라는 용어에 반대하여 새롭게 지은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 의 약칭(略稱)이다. 퇴락한 상감청자(象嵌靑瓷)에 연원을 두고 14세기 후반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여 조선왕조의 기반이 닦이는 세종연간(1419-1450) 전후에 그릇의 질(質)이나 형태 및 무늬의 종류‚ 무늬를 넣는 기법(施文技法) 등이 크게 발전 ·세련되어 절정을 이루며 조선 도자공예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이게 된다. 그러나 15세기 후반부터 경기 광주 일대에 백자(白瓷)를 생산하는 관요(官窯)가 운영되면서 왕실과 관아에서 필요로 하는 자기의 공급을 광주분원(廣州分院)에서 맡게 되자 관장제수공업체(官匠制手工業體)로서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 분청사기의 생산은 점점 소규모화되었고‚ 민간용을 주로 생산하게 되었다. 중앙관요의 영향이 지방으로 한층 파급되면서 백자의 생산이 계속 증가되자 16세기 중엽 이후에는 분청사기의 생산이 급격히 줄어들었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백자가 조선시대 도자기의 주류가 되었다. 분청사기는 그릇 표면에 백토를 분장하는 방식에 따라 상감(象嵌)‚ 인화(印花)‚ 조화(彫花)‚ 박지(剝地)‚ 철화(鐵畵)‚ 귀얄‚ 담금(덤벙) 분청으로 구분되는 데‚ 상감과 인화기법은 발생초기에 주로 사용되었다. 분청사기의 특징은 청자나 백자에서는 볼 수 없는 자유분방하고 활력이 넘치는 실용적인 형태와 다양한 분장기법(粉粧技法)‚ 그리고 의미와 특성을 살리면서도 때로는 대담하게 생략‚ 변형시켜 재구성한 무늬에 있다. 이러한 특징은 지방마다 독특하게 전개되는 양상을 보인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높은 굽에서 사선으로 뻗다가 구연에서 직립하듯 안쪽으로 살짝 내경한 대접이다. 외면의 상단을 귀얄로 거칠게 칠했고‚ 내측면은 횡선으로 구획한 안에 승석문(繩蓆紋)을 빽빽하게 시문한 위에 백토를 칠한 귀얄과 상감의 수법을 썼다. 내저면에는 크게 새긴 원각이 각을 이루었고‚ 3개의 태토비짐 눈이 있다. 유약은 투명유가 얇게 시유되어 있다. 태토(胎土)에는 사립(沙粒)이 섞여 있고‚ 굽의 접지면에서 모래를 받쳐 구운 흔적이 확인된다. <참고문헌> 강인희‚《한국식생활사》‚ 삼영사‚ 1995. 강경숙‚《분청사기연구》‚ 일지사‚ 1986. 호암미술관‚《분청사기 명품전》Ⅱ‚ 2001.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05.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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