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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상감여지문대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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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청자상감여지문대접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2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대접이란 국이나 숭늉 따위를 담는 데 쓰는 위가 넓고 운두가 낮은 모양의 그릇을 말한다. 사발보다 더 크며 국이나 국수 등을 담는 용기를 대접이라고 한다. <발달과정/역사> 대접모양의 그릇은 빗살무늬질그릇시대의 발형도기(鉢形陶器)에서부터 등장하고 있다. 삼국시대의 고분에서 출토된 청동제 완(椀)은 지금의 대접과 그 형태가 같다. 이 형태는 고려와 조선시대의 청자·백자에 이어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는데‚ 오늘날 사기·놋쇠·알루미늄·스테인리스·합성수지 등 다양하게 보급되어 있다. 고려시대의 초기 청자요업은 10세기 후반 중국의 기술을 바탕으로 서남해안지역에 전축요(塼築窯)들이 만들어지면서 시작된다. 11세기 종반 혹은 12세기 전반에 청자 제작은 남해안으로 이동하고 고려화 된 토축요(土築窯)를 이용‚ 급속도로 성장하여 강진(康?)과 부안(扶安) 등지에서 비색청자(翡色靑瓷)를 만들어내었다. 또한 12세기 중반 이후로는 백토(白土)와 자토(瓷土)를 상감하여 청자유를 씌워서 굽는 상감청자(象嵌靑瓷)를 만들어 고려만의 독특한 미감을 발전시킨다. 여기에 13세기를 지나며 금채(金彩)를 가한 화금청자(畵金靑瓷)‚ 구리안료를 시유한 동화(銅畵)청자 등 기교적인 청자가 나타난다. 14세기 중반부터는 왜구의 잦은 노략질과 홍건적의 침입 등의 대외적인 요인과 더불어 권문세족들로 인한 수취체제의 모순이 안정된 기반을 요하는 기술집약적 산업인 청자제작을 어렵게 하였다. 여기에 상업의 발달로 인한 고려 경제의 성장은 이전 시기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던 청자에 대한 수요층을 증가시켜‚ 청자의 대량생산을 필요로 하게 하였다. 질적인 하락과 동시에 많은 수의 자기가 만들어지면서 유조(釉調) 및 작풍(作風)이 점차 저하되어 고려 말기에는 그 제작 양상이 쇠미해졌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직립하는 구연의 끝은 단면을 둥글게 처리하고 동체는 저부로 내려올수록 완만하게 좁아 들어 낮게 내경 하는 굽과 만난다. 굽은 전체를 시유한 후 모래를 받쳐 번조하였다. 외면은 3겹의 선문(線紋)을 위에‚ 2겹의 선문으로 공간을 구획하여 시문하였다. 그 사이에 이중 동심원 안에 국화를 배치하여 백상감 했으며‚ 나머지 공간은 곡선으로 간략화된 당초문을 채워 넣었다. 최하단은 세 개의 점(點)이 있는 연판문을 둘렀다. 내면의 경우 도안화된 당초문대와 운문(雲紋)을 차례로 시문하고‚ 네 곳에 3개의 열매가 달린 여지(?枝)가지를 시문하고‚ 이중 동심원 안의 국화꽃과 그 주변을 꼭지가 밖으로 향하는 여의두문으로 둘러 백상감하였다. 유색은 탁한 청녹색이며 외면의 경우 반 정도가 산화되었다. 내저면에는 잡물이 내려앉았다. <참고문헌> 윤용이‚《한국도자사연구》‚ 문예출판사‚ 1993. 이성우‚《동아시아 속의 한국 식생활사연구》‚ 향문사‚ 1984. 연세대학교박물관‚《고려 조선시대 질그릇과 사기그릇》‚ 2002. 명지대학교박물관‚《박물관도록》‚ 1996. 한국고고미술연구소‚《한국고고학개정용어집》‚ 1984.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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