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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여래유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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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석가여래유적도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2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석가모니의 발자국을 형상화(形象化)한 그림. <유래 및 발달과정> 불상(佛像) 발생 이전에 보리수‚ 법륜(法輪)과 함께 부처를 상징하는 중요한 상징물의 하나이다. 본래는 중인도 마가다(Magadha)국의 큰 돌에 새겨진 불족적(佛足跡)을 당나라 현장법사가 그려서 중국에 전하였다고 하며‚ 누구나 이 부처님의 발자국을 보고 존경심을 가지며‚ 한량없는 죄업이 소멸된다고 하여 예로부터 이것을 만들어 숭배하고 공경하는 일이 유행하였다. 『법현전(法顯傳)』에 수록되어 있는 ‘마갈타국의 화씨성을 지나가면서 남쪽에 있는 바위에다 발자국을 남겨 두시고 곧 열반에 드실 덕을 예언하였다.’ 는 기록과 함께 ‘부처님이 열반에 드실 적에 가섭존자에게 관 밖으로 두 발을 내보이셨다.’ 는 기록 등에서 불족(佛足)에 대한 경배의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또한 32길상 80종호의 한 부분으로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불족도가 처음에는 사성(寫成)되어 신앙되었다고 짐작되나 현존하는 것은 대부분 목판본이며‚ 드물게는 목판의 판목이 전해지기도 한다. 불족도 신앙의 유행과 함께 그 수요에 따라 판각되어 널리 유행되었으며‚ 현존하는 것은 중국 남송의 소흥(紹興) 30년(1160년) 연경사(延慶寺)의 입석(立石)에 새겼던 것에 대한 목판 복각본이 알려져 있다. 국내의 모각은 전북대학교 박물관(1812년)‚ 서울 삼성동 봉은사 및 양산 통도사 박물관 소장본이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봉은사의 목판은 1857년(철종 8년) 복각으로 그 상태나 체제가 가장 좋은 편이다. 목판의 크기는 전체길이 65㎝‚ 너비 36㎝로서 위에는 ‘석가여래유적도(釋迦?來遺跡圖)’ 라 하였으며 그 아래 길이 50㎝‚ 폭 34㎝의 쌍족(雙足)을 양각하였다. 그림 아래에는 다시 불족도의 유래를 적고 있다. 그림은 평면 위주로 처리되었으며 그 내용은 대체로 화문(華文)‚ 만자(卍字)‚ 어형(魚形)‚ 보검(寶劍)의 형상 등 다양하게 표현하였다. 목판의 경우 불족도의 이면에는 108염주도(念?圖)를 새기고 있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는데 이 역시 낱낱 염주에 불‚ 보살‚ 천왕(??)‚ 금강신 및 각종 지옥의 명칭을 열거하고 있어 당시 염주신앙의 형태를 아울러 짐작하게 한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종이에 목판으로 찍어낸 것이다. 명문에 의해 율사(栗寺)에서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지에 흑색으로 찍혀 있는 이 유물은 양 발바닥에 14개의 문양이 들어가 있고‚ 아래에는 발원문이 적혀 있다. 상단에는 ‘釋迦?來遺迹圖(석가여래유적도)’ 가 있다. 화면(畵面)에 있는 발바닥은 2줄의 선으로 구획되었고‚ 양 발바닥에 만자(卍字)‚ 어형(魚形)‚ 보검(寶劍)‚ 법라(法螺)‚ 법륜(法輪)‚ 공양구(供養具)의 형상들이 표현되어 있다. 하단에는 유적도와 관련된 기록이 인쇄된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이 유물과 관련하여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79호 `여래불적도` (전북대학교 박물관 소장)가 있다. <참고문헌> 한국정신문화연구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1992. 김원룡 감수‚『한국미술문화의 이해』‚ 예경‚ 1994.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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