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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림의란포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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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심림의란포유정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23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정환석이 1976년에 쓴 글임 <작품설명> 한국의 현대 서예문화는 1945년 광복과 함께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광복직후의 서예활동은 1945년 9월 손재형이 주도한 조선서화동연회(朝鮮書畵同硏會)의 창립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이 단체의 발족을 계기로 일본인들이 사용하였던 ‘서도’라는 말대신에 ‘서예’라는 용어가 쓰이기 시작하였다. 이 전람회에는 오세창‚ 안종원‚ 김용진‚ 손재형 등의 원로서예가‚ 이상범‚ 노수현‚ 이용우‚ 변관식‚ 최석우‚ 박승무‚ 배렴 등의 화가‚ 송치헌‚ 김기승‚ 이기우‚ 원충희 등의 중?신진 서예가들이 참가하였다.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韓民國美術展覽會 약칭 국전)의 개최로 서예활동이 활성화되기 시작하여서. 1950년대 말까지는 서예계가 국전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초기의 국전(1949-1960)에서는 김기승‚ 최중길‚ 유희강‚ 정환섭‚ 오제봉‚ 박세림‚ 조수호‚ 김응현‚ 최현주‚ 정현복 등이 수상하였다. 초기 국전에서는 광복 이전의 조선미술전람회시대를 대표하던 김돈희 서풍의 잔재가 가시지 않았다는 비판이 가하여지기도 하였으나 해서‚ 전서‚ 예서에서 기교적이며 독자적인 서체를 시도한 손재형의영향이 컸다. 또 해서에서는 안진경‚ 구양순‚ 황정견 풍의 글씨가 많았다. 1950년대 중반부터 국전 중심의 서예활동과 더불어 개인전 활동이 시작되어‚ 1954년 김충현‚ 1955년 이기우‚ 1959년 유희강 등의 개인전이 열렸다. 1950년대 후반이 되면 개인전 활동과 동시에 서예교육 보급에 뜻을 둔 개인 및 민간활동이 대두되었다. 대표적으로 김충현을 중심으로 한 동방연서회‚ 김기승을 중심으로 한 원곡서숙과 대성서예원 등을 들 수 있다. 또 이철경의 갈물서회‚ 유희강의 검여서원‚ 김윤식의 공정서예원‚ 이기우의 철농서회 등이 있었다. 한편 국전 서예부는 1960년대 중반까지도 현대서예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이 시기 역시 손재형 서풍의 영향력이 컸다. 1960년대 후반부터 개인전 활동은 더욱 많아져. 유희강‚ 김기승‚ 이기우 김응현 등이 있다. 이와 함께 단체전‚ 서숙전 등을 통한 발표는 더욱 다양하여졌다. 그러나 양의 증가와 질의 향상이 항상 일치하지는 않았다. 1970년대에서 1980년대초에 걸쳐서는 서예인구가 급격히 확산되고 세속적인 서예학습 경향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개인전‚ 서회‚ 서숙활동 등이 활발하여짐에 따라 국전서예활동이 상대적으로 낮아졌다.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초에는 손재형‚ 김기승의 서예회고전이 열리고 유희강의 왼손글씨 활동이 시작되었으며 김충현 이기우‚ 김응현 등의 작품활동과 작품집 발간 등이 있었다. 깊은 숲속에서 자라는 난초의 절개를 표현한 글이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서예(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0)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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