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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학흉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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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단학흉배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23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도포‚ 전복 등에 장식한 표장 <일반적 형태 및 특징> 김성규 유품 중 하나로 남색바탕의 견(絹)에 수를 놓은 흉배로 운학문을 중심으로 나타내고 있다. 푼사(絲)에 징금수 기법을 사용하였고‚ 오색실로 수놓았으며 가장자리에는 흑선(黑線)을 둘렀다. 학은 고고한 학자를 상징한다 하여 문관이‚ 호랑이는 용맹을 상징한다 하여 무관이 사용하였다. 이처럼 학문을 숭상하는 문인을 학으로 비유하는 상징적인 표현이 관직의 품계를 나타내는 의관제도로 정착되었기에‚ 학을 수놓은 흉배를 다는 문관을 일명 학반(鶴?)이라고도 하였다. 구름과 학은 각기 장수를 나타내는 십장생문(十長生文)의 하나로 함께 배치시킴으로써 불로장생에 대한 의지와 갈망을 더욱 구체화 시켰다. 운학문의 기원은 통일 신라 시대로까지 올라가며 당상관은 쌍학 흉배‚ 당하관은 단학흉배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문관 당하관의 것으로 추측된다. 학은 불로초를 입에 물고 구름 속에 비무(飛舞)하는 모습으로 표현하였으며 깃털을 세밀하게 나타내었다. 구름은 회오리 모양으로 구부러져 엉킨 모양으로 표현하였고 비무(飛舞)하는 학 아래에는 도식화된 물결문양인 수파문을 표현하였다. 수파문은 낭수(浪水)‚ 입수(立水)‚ 와수(臥水)의 세 가지 형식을 갖추고 있는데‚ 입수는 무지개와 모양이 비슷하고‚ 와수는 물고기 비늘을 닮았으며‚ 낭수는 수면위로 튀어 오르는 물방울을 표현한 것이다. 이는 식물의 싹 형태와 유사하게 나타내며 권위를 상징하는 복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수파문 위에는 해가 배치되어 있는데 장수를 의미하는 학과 짝을 맺어 장수‚ 행복‚ 풍요의 운을 비는 의미를 지닌다. <발달과정/ 역사> 흉배(胸背)는 조선시대 왕족과 백관이 입는 상복(常服)의 가슴과 등에 가식(加飾)하던 사각형의 장식품을 말한다. 흉배는 조선시대만 있었던 것으로‚ 그 문양에 따라 품계를 다르게 나타내었는데‚ 왕족이 사용하는 것을 보(補)라 하였고‚ 왕과 왕세자는 용무늬(龍紋)을 수놓은 원형의 보를 가슴과 등과 양어깨에 붙였다. 흉배는 관복과 같은 색의 비단에 다양한 문양을 면밀하게 수놓아 관복을 아름답게 장식해 주며‚ 또한 상하의 계급을 뚜렷하게 나타내 주는 구실을 하였다. 계급의 표시가 되는 주 도안을 중심으로 구름‚ 여의주‚ 파도‚ 바위‚ 물결‚ 불로초‚ 꽃‚ 완자‚ 당초‚ 해‚ 달‚ 물고기‚ 산‚ 장생‚ 모란 등을 수놓았다. 또한‚ 유물에 보면 주 도안을 따로 만들어 그 동물만 바꿔 달면 품계를 나타낼 수 있어 흉배 하나에도 실용성을 꾀하였다. 흉배의 제정에 관하여 처음으로 논의가 있었던 것은 1446년(세종28)이었으나 당시 영의정이었던 황희(관은 쌍학(雙鶴)‚ 당하관은 단학(單鶴)‚ 무관 당상관은 쌍호(雙虎)‚ 당하관은 단호(單虎)를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 제도는 1910년까지 시행되었다. <세부사항> *김성규 김성규는 조선후기의 문신·학자이며 자는 보형(寶衡). 호는 초정으로 연풍(延豊) 출생이다. 유학(儒學)과 수학(數學)을 공부하고 1887년(고종 24) 광무국주사(鑛務局主事)가 되어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같은 해 주차영덕아의법전권공사(箚英德俄義法全權公使: 영국·독일·러시아·벨기에·프랑스공사)의 서기관이 되어 유럽 지역으로 나갔다가 1889년 귀국하였다. 1891년 식년문과에 급제‚ 승정원급분(承政院給分)·상의원주부(尙衣院主簿) 등을 지내고 이어 고창(高敞)·장성(長城) 등의 군수로서 선정을 베풀었다. 1904년 정부가 지방의 부정부패를 일소하고자 청렴결백한 관리를 뽑아 지방으로 보내게 되자 강원도순찰사로 뽑혀 강원도의 탐관오리를 숙청하였으나 조정권신들의 모함을 받아 1905년 파직되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무안(務安)으로 옮겨 목포·장성 등지에 학교를 세워 후진을 양성하는 교육사업에 힘썼으며‚ 1908년 조정에서 정2품의 품계를 내렸으나 받지 않았다.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한때 나병에 걸렸는데 이때 비관 끝에 《병오사(病烏詞)》를 지었다. 시문에 능하고 글씨도 잘 썼으며 문집에 《초정집》이 있다. <참고문헌> 한국정신문화연구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23‚ 25 ‚ 1991/ 임영주‚“전통문양자료집”‚ 미진사‚ 1996黃喜)가 "사미(?靡)를 억제하는 것이 정치의 급선무 인데 국가가 문승(文勝)의 폐가 있는 듯하여 항상 염려가 된다. 단자사라(緞子紗羅)는 우리나라 산물이 아니다. 또 존비등위(尊卑等位)는 금은각대(金銀角帶)로 정하고 있으니 흉배를 하여야할 이유가 없다." 라는 반대의 말을 해서‚ 흉배제정을 그만 둔 후 1454년(단종2) 양성지(梁誠之)의 건의에 따라 문무관 3품 이상의 상복에 흉배를 붙이게 되었다. 그 뒤 1505년(연산군11)에는 1품에서 9품까지 모두 흉배를 사용하게 되었고 1734년(영조10)에 와서는 간편하게 문관 당상관은 운학 흉배‚ 당하관은 백학 흉배를 사용하게 하였고 1871년(고종8)에는 문관 당상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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