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검색

  • 이미지 유형

라이선스 유형

이미지

인장함1

추천0 조회수 70 다운로드 수 2 일반문의
  • 해당 공공저작물은 외부사이트에서 보유하고 있는 저작물로써, 원문보기 버튼 클릭 시 외부사이트로 이동됩니다. 외부사이트의 문제로 인하여 공공저작물로 연결이 되지 않는 경우에는 사이트 바로가기 를 클릭하여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저작물명
인장함1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23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전라남도 양무감리 인장함 <일반적 형태 및 특징> 1887년대에 사용하던 전라남도 양무감리 인장함이다. 내부는 인장을 보관할 수 있도록 칸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외부 상부에는 이동이 편리하도록 손잡이가 부착되어 있다. 외부에는 중간부분이 갈라지며 들어올려 열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또한 뚜껑과 몸통은 경첩으로 붙어있고‚ 열쇠로 잠금장치를 할 수 있도록 제작 되었다. <세부사항> *인장의 기원 고대의 인장은 신성한 영물(靈物)이었다. 주술적(呪術的) 혹은 호부(護符)로서의 인장이 인류최고의 도시문명을 일으켰던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에서‚ 기원전 4000년경에 이르러 이미 사용된 흔적을 보여 주고 있다. 즉‚ 돌이나 조개껍질 따위를 이용해서 문자나 문양(紋樣)을 새긴 인장이 당시의 상류계급이었던 수메르인에게 장신구(裝身具)의 구실을 함과 동시에 호신(護身)의 부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고대 이집트에는 기원전 2000년경부터 황금충(黃金蟲) 형상을 본딴 스카라브(Scarab) 라는 석인(石印)이 있었는데‚ 그것에는 회문자(繪文字) 또는 왕명‚ 인명‚ 때로는 제신(諸神)이나 성수(聖?)의 모습을 음각(陰刻) 하였다. 이집트에서는 황금충을 창조(創造)의 神‚ ?陽의 神으로 숭배했던 것이므로‚ 귀신을 쫓는 호부로서 인체에 간직되었으며‚ 인재(印材)로는 주로 활석질(滑石質)을 사용하였다. 金‚ 銀으로 된 것은 흉장(胸章)이나 지환(指還)으로도 사용하는 풍습이 그리스나 로마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기원전 1600년경 에게문명의 중심지었던 지중해의 크레타(Crete)섬에서는 상형문자를 새긴 인장이 사용되었다. 중국에는 기원전 1000년경 후반‚ 전국시대에서 진한시대에 걸쳐 성행했던 인장에 금수(禽?)나 인물을 새긴 스키타이식의 초생인(肖生印)이 많았으며‚ 특히 신상(神象)을 조각한 것에서 주술적‚ 종교적 성격이 있다. 한인(漢印)으로는 고어인(古語印)의 일종인 「황신월장(黃神越章)」이라는 인장을 보게 되는데‚ 이것을 사람이 산중에서 착용하면 호환(虎?)이나 악신(?神)의 화(禍)를 면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의 인장역사는 고려시대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의 단군고사에‚ 일찍이 환인이 그 아들 환웅에게 천하를 다스리고 인간세상을 구하게 함 에 있어 천부인(?符印)세 개를 주어 보냈다는 것이 최초의 설이며 인장에 대한 영적숭앙(靈的崇仰)의 기록으로는 삼국사기에 국왕이 바뀔 때마다 왕이 명당에 앉아 국새(國璽)를 손수 전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국새가 왕권의 상징이었을 뿐 아니라‚ 사직(社稷)의 안태(安泰)를 빌었다는 기원적(祈願的) 인 의미가 깃들어 있감정의 표현이었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같은 감정은 근세의 조선시기까지 연면히 이어져‚ 왕실에는 보인소(寶印所) 라는 관직을 두어 이를 관장케 하였으며‚ 현존하는 국새(國璽)와 보인(寶印)이 1000개를 넘는 것을 볼 때에‚ 이는 인장이라는 것이 단순한 필요성 이상의 기원적(祈願的)인 존재였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김성규 김성규는 조선후기의 문신·학자이며 자는 보형(寶衡). 호는 초정으로 연풍(延豊) 출생이다. 유학(儒學)과 수학(數學)을 공부하고 1887년(고종 24) 광무국주사(鑛務局主事)가 되어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같은 해 주차영덕아의법전권공사(箚英德俄義法全權公使:영국·독일·러시아·벨기에·프랑스공사)의 서기관이 되어 유럽 지역으로 나갔다가 1889년 귀국하였다. 1891년 식년문과에 급제‚ 승정원급분(承政院給分)·상의원주부(尙衣院主簿) 등을 지내고 이어 고창(高敞)·장성(長城) 등의 군수로서 선정을 베풀었다. 1904년 정부가 지방의 부정부패를 일소하고자 청렴결백한 관리를 뽑아 지방으로 보내게 되자 강원도순찰사로 뽑혀 강원도의 탐관오리를 숙청하였으나 조정권신들의 모함을 받아 1905년 파직되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무안(務安)으로 옮겨 목포·장성 등지에 학교를 세워 후진을 양성하는 교육사업에 힘썼으며‚ 1908년 조정에서 정2품의 품계를 내렸으나 받지 않았다.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한때 나병에 걸렸는데 이때 비관 끝에 《병오사(病烏詞)》를 지었다. 시문에 능하고 글씨도 잘 썼으며 문집에 《초정집》이 있다. <참고문헌> 한국정신문화연구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1 / 전라남도·전남대호남문화연구소‚“전남향토문화백과사전”‚ 2002는 것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新羅時代에 이미 국새를 사용하였음을 알겠으며 고려조 (高麗朝)에 들어서는 고려사의 백관지(百官誌)의 기록에 보면‚ 인부랑(印符郞)이라는 관직을 두어 궁정의 인장을 관장하였음을 알 수 있고‚ 당대(當代) 에는 이미‚ 개인들도 인장을 사용하였을 뿐 아니라‚ 이를 극히 숭상하였음을 볼 수 있다. 즉‚ 개인의 인장에도 용·봉(龍·鳳) 을 아로새겼다든가‚ 청자 (靑磁)를 구어 인형 (印形)을 만들었다든가 하는 것은 인장에 대한 예술적인 감정(感?) 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요‚ 이는 마치 불상예술(佛像藝術)이 불교의 깊은 신앙의 표상이듯이 이같은 인장예술도 인장이 인간에게 주는 영적(靈的)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