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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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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신선도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23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1936년에 남농 허건이 그린 <신선도>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소나무아래 신선과 흰 사슴을 그려 넣었다. <세부사항> *남농 허건 남농은 조선조 철종 때 남화의 대가를 이룬 소치 허유의 손자이며 미산 허영의 아들로‚ 전통남화의 맥인 운림산방의 3대(소치 허련‚ 미산 허영‚ 남농 허건)다. 5살 때까지 진도에서 살다가 아버지 미산 허영을 따라 강진으로 이사간 남농은 한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지만 그림 그리기에 더 흥미를 느꼈다고 한다. 미산은 그림쟁이의 배고픔을 아들에게 물려주지 않기 위해 그림 그리기를 만류했다. 그러나 아버지 등 너머로 사군자를 익히면서 전국소년전람회에 첫 작품을 출품‚ 최고상을 받아 천부적인 재질을 드러냈다. 목포에서 평생을 보내면서 한국 남종화에 뛰어난 예술의 향기를 뿌리며 백포‚ 포전‚ 아산 등 기라성 같은 후진들을 양성하였고‚ 수많은 상을 수상하며 한국 예술원 원로회원의 영예를 누리기도 하였다. 말년에는 사재로 이 기념관을 건립하였으며‚ 평생 수집한 수석‚ 자기‚ 목물과 운림산방 3대 작품들을 향토문화관에 기증하여 문화 발전에 큰 힘이 되었으며‚ 우리 예술계에 문화유산을 사회에 환원시킨 본보기가 되었다. *신선도(神仙圖) 도석화(道釋畵)의 화제 가운데 하나. 신변자재(神變自在)하고 불로장생하는 신선들의 모습과 그 설화를 묘사한 그림을 일컫는다. 주로 도교의 신선사상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발전되었는데‚ 무병장수한 삶에 대한 애착‚ 현세기복적(琅世祈福的)인 염원과 밀착하여 성행하였고‚ 축수(祝壽)·축복용으로 많이 그려졌다. 여러 신선전에 등장하는 수많은 신선 가운데서 신선도의 소재로 많이 다루어졌던 대표적인 신선은 종리권(鍾離權)·여동빈(呂?賓)·장과로(張果老)·한상자(韓湘子)·이철괴(李鐵拐)·조국구(曹國舅)·남채화(藍采和)·하선고(何仙?) 등 8선을 비롯하여‚ 노자(老子)·황초평(黃初平)·마고선녀(麻?仙女)·하마선인·동방삭(東方朔)·서왕모(西?母)·장지화(張志和) 등이다. 이들은 대개 장수와 복록(福祿)을 의미하는 상징물과 함께 그려지며‚ 각 신선마다 전기나‚ 그와 관련된 실화에서 파생된 도상적(圖像的)인 특색을 지니고 단독상 또는 군상(群像)으로 표현된다. 군선도 가운데서 대표적인 것으로는 <반도회도(蟠桃會圖)> <파상군선도(波上群仙圖)> <군선경수도(群仙慶壽圖)> 등이 유명하며‚ 이 밖에 많이 그려졌던 것은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남극성(南極星)을 인격화한 <수노인도(壽老人圖‚ 壽星圖)>가 있다. 이러한 신선도들은 중국의 경우 남북조시대에 등장하여‚ 당(唐)나라 때까지는 인물화로 분류되다가 북송(北宋) 때부터 도석의 화제로 취등에 의해 크게 발전되었다. 특히 김홍도의 화풍은 김득신(金得臣)·이수민(李壽民)·이재관(李在寬)·장승업(張承業) 등을 통해 조선 말기까지 영향을 미쳤다. *운림산방 소치 허유(小痴 許維)의 고택. 남종문인화의 대가 소치 허유의 숨결이 살아 있는 곳이며 소치허유가 말년에 기거하던 화실의 당호로 일명 운림각이라고도 한다. 미산도 이곳에서 그림을 그렸으며 의제 허백련이 미산에게 처음으로 그림을 익힌 곳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유서 깊은 운림산방은 소치(小痴) - 미산(米山) - 남농(南農) - 임전(林田) 등 4대에 걸쳐 전통 남화를 이어준 한국 남화의 본거지이다. *남종화(南宗畵) 명(明)나라 때 막시룡(莫是龍) ·동기창(董其昌)이 제창한 화가의 계통 및 화풍으로 남화(南畵)라고도 한다. 북종화(北宗畵)에 대응되는 말이다. 북종화가 화원(畵員)이나 직업적인 전문화가들을 중심으로 경직(硬直)된 선묘를 사용하여 그린 장식적이면서도 공필(工筆)의 그림을 의미하는 데 반하여‚ 남종화는 대체로 인격이 고매하고 학문이 깊은 사대부(士??)가 여기(餘技)로 수묵과 담채(?彩)를 사용하여 그린 간일(簡逸)하고 온화한 그림이다. 당나라 초기 남북2종설(南北二宗說)은 명나라 때 동기창이 《화지(畵旨)》‚ 《화안(畵眼)》 등 그의 문집 속에서 당대(唐代) 선종(禪宗)에 남 ·북종이 있음을 주목하고‚ 회화에서도 남 ·북종의 구분을 한 데서 비롯된다. *한국의 남종화 한국에서는 정형화된 남종화가 조선 숙종 후반기에 도입되기 시작하여‚ 영조·정조 이후 주도적인 화풍으로 보급되었다.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 《패문재서화보(佩文齋書畵譜)》 등 명·청 남종화계 화보류(畵譜類)의 영향으로 보급된 남종화는 심사정(沈師正)·강세황(?世晃)·이인상(李麟祥) 등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남종화풍의 진정한 보급과 토착화는 김정희파(金正喜?)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시서화본일률(詩書畵本一律)을 추구한 김정희의 작품은 중국 문인화에 비해 손색이 없으며‚ 그의 영향 아래 허유(許維)·조희룡(趙熙龍)·전기(田琦) 등 여러 화가가 배출되었다. 그 밖에도 묵란(墨蘭)의 대가 이하응(李昰應)·민영익(閔泳翊) 등에 의해 진작(振作)된 조선 말의 문인화풍은 근대화단으로 계승되어 오늘날까지 맥을 잇고 있다. <참고문헌> 전라남도·전남대호남문화연구소‚“전남향토문화 백과사전”‚ 태학사‚ 2002 / 장경희 외 편저‚ "한국미술문화의 이해"‚ 예경‚ 1994 / http://www.tournamdo.org급되었다. 남송(南宋) 때는 선종(禪宗)에서의 감필풍(減筆風) 인물화법이 가미‚ 발전되었으며‚ 이어 원(元)나라 때의 안휘(顔輝)에 의해 화법상으로 진전되었고‚ 명(明)나라 때는 오위(吳偉)·장로(張路) 등 주로 절파계(??系) 화가들에 의해 많이 그려졌다. 한국에서는 고구려 고분벽화에 신선들이 등장하고 있으나‚ 고려시대부터 독립된 화제로 대두하였으며‚ 조선 중기인 17세기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성행하였다. 김명국(金明國)을 비롯하여‚ 주로 절파풍(??風)의 화가들이 많이 그렸으며‚ 이러한 전통은 후기로 이어져 심사정(沈師正)·윤덕희(尹德熙)·김홍도(金弘道)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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