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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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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해동원보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23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구리를 주요 소재로 하는 주조화폐. <발달과정/역사> 우리나라 최초의 관전(官錢)은 "『高麗史』「食貨志」貨幣條"에 의하면‚ 성종 15년(996) 4월에 주조된 것으로 추정되는「건원 중보 뒷면 동국 」(乾元重寶 背面 東國)이 우리나라 최초의 주화로 알려지고 있다. 건원중보는 중국의 당 숙종2년(759)부터 주조된 엽전인데 이를 모방하여 중국의 건원중보와 구별하기 위해 상‚ 하부에 동국(東國)자를 새겨 만들다가 뒷 면의 동국자를 앞면으로 내어 「동국중보 (東國重寶) 」를 만든 것이다. 그러나 유통이 미비하자 목종 5년(1002)에는 기존의 포화(布貨)와 철전을 병행하는 전포겸용책(錢布兼用策)으로 동전의 유통을 제한하였다. 그 후 숙종 2년(1097)에 주전관(鑄錢官)을 두고‚ 숙종 6년(1101)에는 은병(銀甁)의 주조하였으며 주전도감(鑄錢都監)을 설치하였다. 숙종 7년(1102)에 이르러 고주법(鼓鑄法)을 제정하여 해동원보(涇東元寶)‚ 해동통보(涇東通寶)‚ 해동중보(涇東重寶)‚ 삼한통보(三韓通寶)‚ 삼한중보(三韓重寶)를 주조하는 한편‚ 관리들에게 유통을 권장하였으며 개경(開京)에 주점과 점포를 설치하는 등 유통의 활성화를 위하여 노력하였나 명목화폐인 동전을 수용할 사회 경제적 여건이 미비하였고‚ 화폐가치에 대한 인식 부족 등으로 예종대에 이르면 동전 유통은 중단되고 만다. 고려시대에는 은·철·동·종이를 소재로 화폐를 제작하여 물품화폐의 기능을 대신하고자 노력하였지만 국가의 화폐유통정책은 실패로 돌아갔고‚ 교환의 주류는 여전히 물품화폐가 담당하였다. <일반적 특징 및 형태> 교환경제사회에서 상품의 교환(交換)‚ 유통(流通)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일반적 교환수단 내지 일반 유통수단으로 계산척도(計算尺度)‚ 가치척도(價値尺度)‚ 지급수단(支給手段)‚ 가치저장수단(價値貯藏手段)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처음에 동전은 칼이나 농기구의 모양을 모방하여 만들었으며‚ 차츰 우리가 알고 있는 엽전의 모양인 둥근 모양에 네모진 구멍이 뚫린 형태로 일반화된다.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동양적 사고 때문이다. 또 동전을 보물처럼 여겼기 때문에 통보(通寶)라 부르며‚ 동전을 다시 만들면 중보(重寶)라 하였다. <참고문헌> 한국화폐소사(최호진‚ 서문당‚ 1974) 한국의 화폐(장상진‚ 대원사‚199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1991) 두산 세계 대백과사전(두산동아‚ 1996)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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