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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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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청동인장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23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금‚ 은‚ 옥‚ 수정 및 돌‚ 나무 또는 뿔(角)‚ 뼈(骨) 등에 글씨나 그림‚ 문양 등을 조각하여 인주나 잉크 등을 발라 찍음으로써 개인이나 단체를 증명할 수 있는 신물(信物). 도장 또는 인감(印鑑)‚ 인신(印信)이라고도 불림. <발달과정/역사> 중국의 경우‚ 인장의 발달은 1세기경‚ 후한(後漢)시대에 종이가 발명된 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에는 나무나 참대(竹)에 기록한 서간(書簡)을 봉하는 데 진흙을 사용하여 거기에 인장을 눌러 봉하였다. 이것을 봉니(封泥)라 하며 각처에서 출토되고 있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인장은 은허(殷墟)에서 출토된 정사각형과 직사각형의 옥판(?板)에 새긴 ‘은새(殷璽)’이며 다음으로는 동주(東周) 말기 및 전국시대의 청동인(靑銅印)을 꼽는다. 인장제도가 정비된 것은 진(秦) ?한(漢) 때부터이며 진의 시황제(?皇帝)는 소부(小府)에 부절령(符節令)이라는 관직을 두어 국새를 비롯한 각종 인장을 관리시켰다. 한대의 관인은 중앙정부에서 관직에 따라 반포(頒布)하고 관직에서 물러날 때에는 정부에 반납하였다. 그 관인에는 수(綬)라고 하는 긴 끈이 달려 있어 그것을 허리에 감고 관인을 차고 다녔으므로 관직에 임명되는 것을 ‘인수(印綬)를 띤다’고 하였다. 후한시대 종이가 발명되면서 그때까지 봉니로서 입체적으로 사용되던 인장은 평면적으로 사용하게 되어 인장사(印章史)에 혁명을 가져왔다. 송대(宋代)에 이르러 인장은 서화(書畵)의 낙관(落款)으로도 사용하게 되어 많은 인영(印影)이 전해진다. 재료는 청동인 외에 금?은?옥?도기(陶器)?나무 등이 사용되었고‚ 청동인(靑銅印)은 주로 주조인(鑄造印)이며 그 밖에는 조각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인장을 사용하게 된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신라 때에는 국왕이 바뀔 때 국새를 손수 전한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있어 그 이전부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에는 인부랑(印符郞)이라는 벼슬이 있어 나라의 인장을 맡아보았다는 기록이 있고‚ 또 이때는 개인들도 인장을 소지한 것으로 보이며‚ 그때 사용하던 청자로 만든 도제인장(陶製印章)과 청동인장 등이 전해진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인장제도는 더욱 정비되어 1392년(태조 1)부터 상서원(尙瑞院)을 두어 새보(璽寶)와 부패(符牌) 등을 관장하게 하였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단종(端宗)의 인장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지보(純定安莊景順敦孝??之寶)’와 단종 왕비의 인장인‘단량제경정순왕후지보(端良齊敬定順?后之寶)’를 비롯하여 여러 개의 옥새가 보관되어 있으며‚ 한말에 사용하던 순금제 인새(印璽)인‘제고지보(制誥之寶)’와‘대원수보(?元帥寶는 행수관(行首官)이 인계하였다. 지방관아에서 관찰사는 경상(境上)에서‚ 절도사?첨사 등은 진문(鎭門)에서‚ 수령?찰방(察訪) 등은 아문(衙門)에서 손수 인장을 주고받았다. 옛날부터 이 인장의 인영(印影)을 모은 인보(印譜)가 성행하여 중국은 물론 한국과 일본 등에 많은 인보가 전해진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인장은 본래 정치에 있어 신빙하게 하는 신물 또는 새절(璽節)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인장의 역사는 오래되어 일찍이 환인(桓因)이 그 아들 환웅(桓雄)에게 천하를 다스리고 인간세상(人世)을 구하게 함에 있어 천부인(?符印) 세 개를 주어 보냈다는 단군고사(檀君故事)에서 비롯되고 있다. 또한 인장은 봉니(封泥)로부터 인니(印泥 : 인주)로 붉게 찍게 되어 인은 기(記)‚ 혹은 주기(朱記)라고도 한다. 관인(官印)은 관계의 등급에 따라 가장 큰 것은 4치〔寸〕에 이르고 모두 관변(寬邊)이며‚ 정방형인 것은 인‚ 장방형인 것은 관방(關防)이라 칭하였다. 계급이 낮은 관원들의 인은 조정을 거치지 않고 발급되는 만큼 검기(鈐記) 혹은 착기(素記)라 하였으니 인장을 찍어 기록한다는 뜻이다. 우리 나라의 인장은 고려시대의 동인(銅印)이 있고‚ 조선시대의 관인‚ 사인이 있다. 고려의 인장으로 현존하는 것은 대부분 동인으로 방인(方印)‚ 육각인(六角印)‚ 원인(圓印)이다. 이들의 인문(印文)은 판독하기 어려운 것이 많고‚ 자체(字體)는 구첩전(九疊篆‚ 글자 획을 여러 번 구부려서 쓴 서체)이며 배자(排字‚ 글자가 놓인 위치)는 방사선식이라 문자는 원주(圓周)로 향하여 머리를 두고 있다. 이러한 양식의 동인은 대개 봉함인(封緘印)이다. 이러한 고려인의 유풍은 조선조에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 조선조의 관인은 모두가 동인 내지 철인으로 상서원(尙瑞院)에서 주조하였으며‚ 방인으로는 방촌과 3촌-4촌에 이르고 인문에 있어서는 구첩전과 소전이 그 대부분을 이룬다. 사인(私印)의 종류에는 방형‚ 장방형‚ 원형‚ 잡형 등이 있으며‚ 인문으로 정하여지는 종류는 성명‚ 표자(表字)‚ 별호‚ 관직‚ 재호(齋號)‚ 총인(總印)‚ 서간‚ 사구(詞句)‚ 길어(吉語) 등 다양하다. <참고문헌> 한국의 인장(국립민속박물관‚ 1987) 기증유물특별전-김연호 수집문화재(국립청주박물관‚ 1991))’‚ 은으로 만든‘칙명지보(勅命之寶)’도 전해진다. 조선시대에는 국초부터 관인에 대한 제도를 엄격히 하여 관직의 고하에 따라 크기가 달랐고‚ 또한 관원이 교대할 때에도 중앙과 지방에 따라 관인을 전달하는 방법을 달리하였다. 즉 1품관은 한 변의 길이가 약 8.8 cm(2치 9푼)의 정사각‚ 2품관은 약 8.5 cm‚ 3품관은 7.6 cm‚ 4품관은 7 cm‚ 5 ?6품관은 6.4 cm‚ 7품관 이하는 5.5 cm로 규정하고 이들의 아내의 인장도 그 치수를 규정하였다. 한편 관원이 교대될 때에는 관인을 반드시 손수 전달하도록 하여 당상관(堂上官)이 있는 관아에서는 당상관이 직접 교부하고‚ 3품 이하의 관아에서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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