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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복필국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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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이한복필국화도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23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이한복(李漢福)의 국화도. <작가설명> 이한복(李漢福) : 1897∼1940. 한국화가. 본관은 전의(全義). 호는 무호(無號)‚ 초호는 수재(壽齋)이며‚ 낙관(落款)에는 이복(李福)이라 쓰기도 하였다. 어려서 조석진(趙錫晋)과 안중식(安中植)에게 전통화법을 배운 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1918년 동경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 일본화과에 입학하여 1923년 졸업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서화협회(書怜協會) 회원으로 1921년 첫 협회전람회부터 줄곧 참가하였고‚ 1922∼1929년까지는 조선미술전람회에도 출품하였다. 미술학교에 유학한 새로운 회화의식으로 1920년대의 청년작가 시기에는 근대적인 일본화풍과 서양화법에서 자극을 받은 현실적 시각 및 정감의 사실적인 채색표현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1930년 무렵부터는 전통적 한국화 취향으로 돌아가 수묵담채의 산수화와 화조화를 온건한 필치로 그렸다. 그 작풍(作風)이 뚜렷한 독자적 경지는 아니었다 해도 당시로서는 새로운 표현감각의 전통화가로 평가되었다. 죽기 직전인 1940년 조선미술관(吳鳳彬 운영)이 관계사회의 원로와 안목인사들의 추천 및 논의를 거쳐 선정한 ‘10명가산수풍경화전(十名家山水風景怜展)’을 개최할 때 이한복도 거기에 들었다. 서울의 휘문(徽文)·보성(普成)·진명(進明) 등 여러 학교에서 미술교사를 역임하였고‚ 고서화(古書怜)의 감식안목이 높았다. 일찍부터 글씨도 즐겨 오창석체(吳昌碩體)의 전서(篆書)를 잘 썼고‚ 조선미술전람회에 글씨와 그림을 같이 출품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1925년 서울 기독교청년회관(YMCA)에 미술과가 설치되어 남녀 연구생을 모집하였을 때에는 동양화부 실기를 맡아 지도하였다. <작품설명> 이 국화도(菊花圖)는 1930년대 이후의 작품으로 전통화법에 바탕을 두고 거기에 색채나 표현에 있어 독특한 기법을 가미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하단의 두 송이 국화를 전통적 황색(黃色)이 아닌 홍색(紅色)계열의 담채를 설채(設彩)한 것이 눈에 띈다. 왼쪽 하단에서 오른쪽으로 갔다가 다시 왼쪽 상단에서 마무리를 한 ‘S’자 형태의 구도를 보이고 있으며‚ 오른쪽 상단에는 시(詩)가 있는데 이 역시 이한복(李漢福)의 작품인 것으로 생각된다. 촉경승래건불평(觸景乘來?不平) 인정나사물○정(人?那?物??) 우향동이수만직(偶向東籬羞滿直) ○황화필○위연명(?黃華筆????) 요자입위궤일사도(了子立危詭?刀) 하이○상공대인법감(荷以相公?人) 법감(法?) 무호 이한복(無號 李漢福) 이라 적혀있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정신문화연구원)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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