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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장군형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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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명문장군형토기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24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물·술·간장·오줌 따위를 담는데 쓰는 그릇. <발달과정/역사> 장군형 토기는 7세기 이후가 되면 분묘에 부장된 것이 다수 확인된다. 우리나라에 문자(文字)가 처음 도입된 시기는 철기시대 무렵이며‚ 한자가 처음 등장한 것은 중국 전국시대의 명도전(明刀錢)과 진(秦)의 25년명청동꺽쇠창(二十五年銘銅戈)‚ 5년이씨명청동창(五年二氏銘銅?) 등이 평양 지역에 유입된 기원전 3세기-2세기 전반경이다. 이후 한나라와 교역을 통해 한자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용하였으며‚ 기원전 1세기 유적인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 붓과 글씨를 지우는 삭도(削刀)가 발견되어 그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삼국시대에는 주변국가와 활발한 교류‚ 불교문화 수용 등으로 문자가 전(前) 시대보다 널리 보급되었다. 그 중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선진 문물의 수용이 늦어 문자와 기호명 유물 등도 늦게 나타난다. 그러나 5-6세기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에서 호우와 서봉총(瑞鳳塚) 은합(銀盒) 등 문자가 새겨진 금속유물이 발견되어 5세기 경부터 문자를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6세기 초에는 영일 냉수리비(503년)‚ 울진 봉평비(542년)‚ 영천 청제비(536년) 등 의 비석과 거칠부의 국사 편찬이라는 점에서 한문에 대한 해독능력이 뛰어났을 것으로 생각한다. 6세기 중엽 이후 문자와 기호명이 새겨진 토기가 증가하며 이 시기 이후에는 경주뿐 아니라 지방에서도 문자‚ 기호명토기가 증가한다. 신라의 특징 중 하나는 한문에 이두문자를 사용한 것이다. 통일신라는 삼국 통일로 인한 삼국의 문화 수용‚ 당 문물 수용‚ 불교 문화 확산 등으로 문자의 사용계층이 넓어졌다. 더욱이 세계 최고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光?陀羅尼經)"을 발간하며 인쇄문화의 시대를 열게 되었다. 이는 고려 금속활자의 밑거름이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그릇으로 중두리를 뉘어놓은 모양의 것. 한쪽 마구리는 편평하고 다른 쪽 마구리는 반구형(半球形)이며‚ 배때기에 좁은 아가리를 붙였다 여기에서 소개하는 유물은 장군형 토기로‚ 외면에 "出伊火"라는 명문이 있다. "出伊火"는 신라의 지명으로 "火"는 "들" 이란 뜻으로 서라벌(徐羅伐)의 "벌(伐)"과 같은 의미이다. 벌(伐)은 고구려에서 는 "홀(忽)"‚ 백제에서는 "부리(?里)"로 사용된다. 토기 옆면의 안쪽에는 제작할 때 다듬은 흔적인 지두흔(指頭痕)이 보인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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