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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호 간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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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이종호 간찰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24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이 간찰은 15줄의 초서체로 이종호의 편지글 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로 적조 하였든 것은 형제 때문입니다. 천리나 되는 외지에 앉아 있으니 바로 이것이 하늘 끝같아 슬픈 감회가 갑절이나 오갑니다. 엎드려 생각컨데‚ 금년 내내 정체 평안하고‚ 늙은 근력이 더욱 쇠약한데까지 이르러 않았는지 궁금합니다. 나는 이곳에 부임한 이래로 물이 맞지 않아서 종종 병을 앓고‚ 날씨가 더우면 누워 있게 되고‚ 추우면 기침을 하게 되어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있고‚ 우리 고을에는 흉년이 자주 들어서 몹시 괴로우며 대책을 세우지 못하여 공사(公私)로 고민되어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오촌(梧村)또한 평안히 지냈는지요? 들으니 그의 여혼(女婚)을 정하였다고 하니 과연 어떻게 행사를 할 것인가. 자못 몹시 염려가 됩니다. 이것은 고원땅과 이웃이고‚ 항상 당신일과 등과 함께 형의 주변에 관한 얘기를 하여 주고 받고 있습니다. 나머지는 인면의 재촉으로 이만. 안부를 멈추고 예의를 갖추지 않습니다. 계해년 11월 20일 제 이종호 절하고 올림." 이종호(1885고종22-1932)는 육영사업가로 내의원경(內醫院卿)용익(容翊)의 손자이며 현좌(賢左)의 아들이다. 함북 명천 출신으로 1901년 조부 사후 보성학교 2대 교주가 되었으며 한북 학회에 속성사범과를 설치하며 소학교 교원을 양성했다. 그밖에 형성‚ 강화‚ 보창‚ 청주 보성학교 등을 사재로 경영 사재로 경영했으며 평양 대성학교 설립에도 참여했다. 또 보성사 인쇄소를 통해 많은 서적과 교과서를 간행‚ 전국 각학교에 무료 배부함으로써 후진교육에 기여하였다. 한일 합방이 되자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해 권업회를 조직하고‚ 4개처에 학교를 세웠으며 권업신문을 발행했다. 1917년 상해서 일본경찰에 체포 되어 귀국 했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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