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검색

  • 이미지 유형

라이선스 유형

이미지

청자전편

추천0 조회수 32 다운로드 수 0 일반문의
  • 해당 공공저작물은 외부사이트에서 보유하고 있는 저작물로써, 원문보기 버튼 클릭 시 외부사이트로 이동됩니다. 외부사이트의 문제로 인하여 공공저작물로 연결이 되지 않는 경우에는 사이트 바로가기 를 클릭하여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저작물명
청자전편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27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점토를 틀에다 찍은 다음 건조시키거나 구운 벽돌. [발달과정/역사] 중국 은(殷)·주(周) 때에는 없었고 전국시대(戰國時代)부터 사용한 듯하다. 우리 나라 전을 시대별로 개관하면 삼국시대에 제작된 전은 많지 않을 뿐 아니라 사용된 유구(遺構)의 원상이 보존된 예는 더욱 적다. 고구려의 영역 안에서 낙랑군시대의 전축분묘가 유행하여 지금까지 발굴‚ 조사된 수가 적지 않은데도 고구려에서는 전으로 고분 주체부를 축조한 일이 전혀 없다. 다만‚ 통구(通溝)지방의 태왕릉(??陵)과 천추총(千秋塚)에서는 돌더미 속에서 `願??陵 安?山固?岳(원태왕릉 안여산고여악)`‚ `?秋萬歲永固(천추만세영고)`‚ `保固乾坤相畢(보고건곤상필)` 등의 문자가 돋을새김된 전편이 발견된 일이 있는데 어떠한 형태로 사용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봉토의 일부에 사용하였던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고신라시대 전의 발견례는 더욱 적다. 선덕여왕 때 양지(良志)가 전으로 작은 탑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실물은 현존하지 않으며‚ 분묘는 고구려·백제와 달리 현실(?室)을 마련하지 않은 원시적 구조로 전을 사용할 여지가 없다. 다만 경주 황룡사지(皇龍寺址)의 일부에서는 무문전(無文塼)이 깔려 있는 유구가 발견된 일이 있다. 고구려나 신라에 비하면 백제는 전을 사용한 예가 상당히 많다. 가장 뚜렷한 예는 공주 송산리에 있는 전축분 2기이다. 그 중 1기는 매지권(買地券)에 의하여 백제 무녕왕릉임이 밝혀져 매우 주목되었다. 송산리 제5호분에 사용된 전문에 대각사선을 그은 것과 사릉격문(斜稜格文)의 두 가지 기하문 (幾何文)은 중국 난징(南京)에서 발견된 육조시대(六朝時代) 남조(南朝)의 전 문양과 동일하며‚ 공주에서 출토된 전 중에 측면에 ‘梁良口爲師矣(양량구위사의)’라는 문자가 오목새김되어 있는 예와 아울러 중국 남조‚ 특히 양(梁)나라와 문화적인 연관이 깊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자 전의 사용 범위는 넓어지고 형태와 문양‚ 제작수법에서 눈부신 발전을 보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의 전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8엽보상화문을 주문양으로 한 방형전이다. 신라시대에도 불교상을 조각한 전이 적지 않게 발견되었다. 경주 사천왕사지에서는 벽을 장식하던 사천왕상전이 출토되어 크기‚ 각선의 예리함‚ 도상(圖像)의 특이함‚ 녹유(綠釉) 시유 등 7세기 후반의 신라 공예기술을 과시하고 있다. 한편‚ 통일신라시대에는 전탑이 상당수 건립되었는데 그 중에는 문양전을 사용한 예가 있다. 고려시대에도 전은 여전히 사용되었으나 신라시대의 다양한 형태와 화려한 문양 등에 비하면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초기에는 신라의 형식을 따조선시대에도 전은 사용되었지만 용도나 장식문양에는 큰 변화가 생긴다. 전으로 바닥을 까는 일은 거의 없어지고 문루나 담을 쌓기도 하나‚ 여기 사용되는 전에도 문양은 없다. 경복궁에 현존하는 굴뚝(煙家라고 함)에는 각종의 크고 작은 전을 사용하였고‚ 초화(草花)·솔·국화·학 등 각종 문양을 채색으로 장식하였다. 말하자면 고려시대까지의 불교적인 색채가 사라지면서 새로운 형태로의 커다란 전환이 보인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조전(條塼)·방전(方塼)·공전(空塼) 등이 있다. 조전은 장방형으로 주로 가옥·성벽·묘실용(墓室用)으로 사용되며‚ 이따금 측면에 화상(怜像)·나뭇결무늬·제작 연월일·성명을 조각한 것도 있다. 방전은 바닥·벽 등에 사용되며‚ 표면 또는 측면을 문양으로 장식하는데 당대(唐代)에는 연화문·보상화문이 유행하였다. 공전은 갱전(坑塼)이라고도 하며 묘실용으로 제작된다. 주로 진한대(秦漢代)에 사용되었으며‚ 1m 내지 2m에 이르는 큰 것도 있고 표면에 화상문을 찍은 것이 많다. 전의 발달은 목재의 부족을 보충할 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조전에 나뭇결무늬‚ 즉 제주(題湊)가 나타나는 이유는 그 까닭이라고 한다. 우리 나라의 전은 틀에서 찍은 것을 구워서 사용하였고‚ 삼국시대부터 최근까지 계속 사용되고 있으나 시대에 따라 용도·형태·문양 등에 변화가 생긴다. 종류·시문(施文)위치 등이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가장 많이 쓰이는 문양은 연화문 (蓮花文)과 보상화문(寶相華文)이다. 여러 가지 문양과 함께 쓸 때에도 연화문이나 보상화문은 언제나 주문양으로서 중심되는 위치에 배치된다. 경주 안압지 출토의 보상화문전과 부여 규암리 출토의 연화문전은 대표적 작품이다. 전의 문양 중에는 불교적인 주제가 있다. 점토판에 삼존불(三尊佛) 또는 천불(千佛)을 조각한 이른바 전불(塼佛)이 있고‚ 이와 유사한 내용인 사천왕상전(四??像塼) 또는 불상·탑·불각(佛閣) 등을 조각한 것도 있다. 전불은 출토지가 경주라고만 전할 뿐 그밖의 사실은 불분명하며 용도도 분명하지 않다. 사천왕상전은 사천왕사지에서 파편으로 출토되었을 뿐 그 밖의 곳에서는 출토된 일이 없다. 이 전은 청자로 만들어진 전으로 대부분 결실되 문양의 형태를 파악할 수 없으나 草紋으로 보여진다. 측면과 바닥은 유약처리를 하지 않았으나 측면은 일부 흘러내려서 유약이 묻었다. 가는 모래가 조금 혼입되었으나 태토는 정선되었다.른 보상화 또는 연화가 장식된 방형전 또는 녹유전이 간혹 발견되나 초기가 지나면서 대부분 벽전이고‚ 문양은 신라의 문양이 선적(線的)이어서 화사한 느낌을 주는 데 반하여 고려의 문양은 면을 넓게 살려서 조형감각에 차이가 있다. 때로는 문양의 배경에 횡선 또는 물결무늬를 촘촘히 쳐서 번잡스러운 느낌이 난다. 고려시대에도 신라의 풍을 따라 문양전으로 축조한 탑이 1기가 남아 있는데‚ 경기도 여주 신륵사다층전탑(神勒寺太層塼塔)이 그것이다. 여러 차례 보수를 거치는 동안 원형과 많이 달라졌지만‚ 반원연주문(半圓聯?文) 안에 당초문을 장식한 문양이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의 전은 빈약한 듯하면서도 특수한 것이 있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