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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문토기저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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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무문토기저부편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27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개념] 한국 청동기시대의 토기를 일괄해서 일반적으로 `민무늬토기`하고 하나 민무늬토기(無文土器)라는 용어는 원래 과거 일본인학자등이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는 물론 간토기(磨硏土器)와도 구분하였던 용어이다. 이러한 개념을 충실히 따라서 북한에서는 청동기시대의 토기를 갈색민그릇과 간그릇으로 나누어 살피고 있지만‚ 남한에서는 마연(磨硏)이나 채색(彩色) 등의 표면처리 수법에 관계없이 통틀어 민무늬토기라고 한다. 민무늬토기란 문자 그대로라면 무늬가 없는 토기라는 뜻이지만 실제로 청동기시대에 속하는 토기 중 지역에 따라서는 평북 신암리토기(新岩里土器)를 비롯하여 무늬가 장식된 예가 많다. 또한 시대적인 측면에서 볼 때 남한에서 실제 사용한 예를 보면 민무늬토기는 청동기시대의 토기에 한정되지 않는다. B.C.3세기 이후 철기시대 후기형식의 민무늬토기‚ 그리고 B.C.1세기경 한대(漢代) 철기가 본격적으로 유입되었을 때도 연전히 민무늬토기가 사용되었다. 심지어는 남한의 원삼국시대 혹은 삼국시대 전기에 타날무늬토기(打捺文土器)와 공반하는 무늬없는 토기‚ 예를 들어 한강유역의 중도식토기(中島式土器)를 민무늬토기로 보기도 하는데 이 경우 민무늬토기 개념이 지나치게 확대‚ 적용된 것으로 시대적 의미가 약해지기 때문에 곤란하다. 나아가서 민무늬토기를 시대의 표지유물(標識遺物)로 보아 청동기시대를 대신하여 사용하는 `민무늬토기시대`라는 개념은 청동기뿐만 아니라‚ 철기 사용기에 두루 걸쳐 지나치게 포괄하는 시대개념(時代槪念)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발달과정/역사] 대체로 본격적인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 사용기가 되면 민무늬토기의 분포권은 더욱 확대되어 북으로는 송화강 유역‚ 남으로는 금강‚ 영산강 그리고 낙동강 유역뿐만 아니라 멀리 제주도까지 이른다. 우선 요하에서 압록강 하류에 이르는 지역에 있어서 비파형동검 사용기의 표지적인 토기로는 의주 미송리(美松里) 동굴유적에서 처음 확인된 미송리형토기(美松里型土器)가 있다. 전형적인 미송리형토기는 표면을 마연하고 납작 항아리 양쪽 옆에 손잡이가 달렸으며‚ 폭이 넓게 올라가다가 다시 안으로 오므라들면서‚ 동체와 목에 묶음식 대선문(帶線文)을 두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미송리 항아리형토기와 공반하는 깊은 바리에는 전 단계에 유행하였던 겹아가리가 많다. 이 지방의 미송리형토기는 다른 지방으로 퍼져 송화강 유역에서는 시투안샨쯔형(西團山子型) 등으로 지역화하여 나타난다. 나아가 대동강 유역에서는 평양 남경 출토 검은간토기를 미송리형토기로 보기도 한다. 송화강 유역에서는 앞서 말했듯이 미송리형토기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는 시투안샨쯔형토기(西團山子型)가 초기 부여의 표종을 이루는 것은 두만강과 함남지방에서 유행하던 구멍무늬토기(孔列土器)이다. 함남지방 금야(金野) 유적 출토토기로 대표되는 금야식토기(金野式土器)도 구멍무늬장식과 꼭지손잡이가 특징적인데 동해안을 따라 남쪽 울산 검단리(檢丹里)까지 이른다. 흔암리식토기도 남쪽으로 퍼져 제주도 대정 상모리(上慕里) 유적까지 이른다. 한편 금강‚ 영산강 유역에는 금강의 부여 송국리(松菊里) 유적 출토토기로 대표되는데‚ 아가리가 살짝 바깥으로 벌어지고 동체가 길쭉한 고구마형을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여기서도 붉은간토기 단지와 대접 모양의 토기가 공반된다. 송국리식토기는 원형 집자리‚ 삼각형돌칼(三角形石刀) 그리고 홈자귀(有溝手斧) 등과 함께 이 지역의 독특한 유물·유적복합군을 이루고 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요동지방과 청천강 이북에는 전국시대(戰國時代) 연(燕)나라 화폐 명도전(明刀錢)과 다량의 철제물이 발견된다. 이는 B.C.3세기경 전국시대 중국문화가 이 지역에 미쳤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이와 함께 중국식 회도기법(灰陶技法)의 토기도 이 지역에 함께 유입된다. 민무늬토기와 달리 돌림판(回轉板)을 이용하여 형태를 빚은 다음 밀폐 가마에서 환원염(還元焰)으로 구워낸 것으로 토기를 굽는 온도는 민무늬토기보다 높다. 이와는 달리 전국계 철기의 보급이 미미한 청천강 이남지역의 토기는 민무늬토기 수법을 그대로 계승한다. 그 대표적인 것은 남한지방에 유행하는 수석리-괴정동식(水石里-槐亭?式)의 점토띠토기(粘土帶土器)이다. 이 토기는 아가리에 점토띠를 붙여 돌려가면서 붙인 것으로 처음에는 단면이 원형(圓形)을 이루다가 후기로 가면서 삼각형으로 변한다. 이 토기형식의 조형으로 주목되는 토기는 요녕지방의 旅?市 二道河子를 비롯한 초기 세형동검(細形銅劍) 출토유적의 겹 아가리 토기이다. 한편으로 이 점토대토기가 대동강 유역의 신흥동식 겹아가리토기화 함께 검은간토기(黑陶)는 대전 괴정동 돌덧널무덤(石槨墓)에서 출토된 것이 대표적으로 긴 목에 둥근 동체(胴體)가 달린 것이다. 이러한 토기는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이 부장된 沈陽 鄭家窪子 무덤에서도 출토되었으며‚ 점토대토기와 함께 계승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 토기는 적갈색의 민무늬토기이다. 구연부는 외반하여 몸통은 장란형이다. 몸통은 상하로 빗질을 하였으나 상당히 거친 느낌을 준다. 밑동은 평저이며 바탕흙은 고운 점토에 굵은 모래가 다량 혼입되었다. 뚜껑은 회청색 타날문토기현으로 저장용토기로 보여진다. 이 토기는 회적색의 연질토기 저부편이다. 바닥은 평저이며 몸통과의 이음부가 두터운 편이다. 굵은 석영이 다량 혼입되었다.지유물로 보고‚ 양자 사이에 나타나는 토기형식의 유사성을 들어 고조선과 부여 주민간에 교류와 친분이 있었다고 북한학자들은 주장한다. 한강 유역과 그 이남지방에는 대동강 유역의 신흥동식토기가 지역화한 가락동식토기(可樂?式土器)가 있는데‚ 겹아가리의 빗금무늬가 연속적으로 시문(施文)되고‚ 전체 그릇 모양은 바닥이 넓어져 팽이형(角形)에서 화분형(花盆形)으로 바뀐다. 같은 한강 상류의 흔암리(欣岩里) 유적 출토토기는 구멍무늬장식의 역삼동식토기와 겹 아가리의 가락동식토기가 공반되거나 두 형식의 토기 속성이 복합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주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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